ABC도 몰랐던 탈북민들, 어떻게 영국에 정착했을까

[기획취재⑤] 탈북민 코리아 엑소더스: 제3국행 택하는 탈북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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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탈북 모자 사망 사건, 2022년 탈북 여성 고독사 사건 등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부적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지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데일리NK는 ‘탈남'(脫南)해 제3국행을 택한 탈북민들에게서 한국 사회 부적응 원인을 살펴보고 탈북민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원과 노력이 무엇인지 진단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해외 지역 최대 탈북민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는 영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영국 런던 뉴몰든에 위치한 재영 탈북민 정착 지원 NGO ‘커넥트북한'(Connect: North Korea) 사무실. /사진=데일리NK

영국행을 택한 탈북민들은 영국에 도착해 난민 지위를 얻는 단계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난민 신청부터 북한 출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진행되는 변호사와의 인터뷰, 정부 기관 지원금을 받는 일 등 모든 과정이 영어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한 재영 탈북민은 “홈오피스(Home Office, 내무부)에 난민 신청을 하러 갔는데 연락이 갈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말을 못 알아듣고 담당자가 나올 때까지 집에 못 간다며 버티고 있었다”며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영어뿐만이 아니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후에도 집 보조금은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 무상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에 온 탈북민들은 한국 교민들이 모여 사는 런던 교외 뉴몰든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 교민들이 다니는 교회를 통해 정착에 필요한 정보를 하나둘 얻었다. 그러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탈북민들에게도 정착에 관한 정보를 공유해주고 친목도 다지자는 목적에서 2008년 ‘재영조선인협회’라는 자체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이 단체의 발기인 대회부터 함께한 재영 탈북민 김주일 씨는 “처음에 영국에 온 탈북민들이 정보가 없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며 “공공기관에서 레터(편지)가 날아오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비자 문제, 아이들 학교 문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한 경험을 나누고 소통하는 커뮤니티가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의견이 모였고 연합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며 “초기에는 정착과 관련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설명했다.

2007년 영국에 온 탈북민 김주일 씨. 그는 탈북민들 간 영국 정착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재영 탈북민 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사진=데일리NK

그러나 각자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데다 다른 탈북민들을 도와줄 만큼 영어에 능통한 사람도 많지 않아 탈북민 커뮤니티가 탈북민들의 영국 정착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특히 탈북민 중 일부는 ‘영국 정착 브로커’를 자청하며 정착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준 대가로 돈을 받는 식의 돈벌이를 하기도 해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에 현재는 정착 지원보다 북한 인권 증진, 네트워크 확대 및 친목 도모에 중점을 둔 탈북민 단체가 각각 운영되고 있다. 

현재 영국에 있는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데 초점을 두고 활동하는 조직은 ‘커넥트북한’(Connect: North Korea)이라는 NGO 단체가 거의 유일하다. 커넥트북한은 지난 2017년부터 재영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탈북민주민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탈북민들이 특히 어려워하는 공공기관 행정 처리나 의료 서비스 이용 등 여러 생활적인 측면에서 통역을 지원하기도 하고 탈북 과정에서 받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한 정신 상담도 제공하고 있다.

취재팀이 지난 6월 뉴몰든에 있는 커넥트북한 사무실을 방문한 날도 60대 남성, 30대 여성 등 탈북민들이 수시로 문을 열고 들어와 직원들에게 행정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이었다. 탈북민들이 공공기관에서 날아온 편지를 들고 시도 때도 없이 사무실을 찾아와 물어보는 통에 현재는 아예 ‘민원의 날’을 지정해놓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탈북민이 커넥트북한을 통해 영국 정착에 필요한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재영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NGO 단체 ‘커넥트북한'(Connct: North Korea)의 마이클 글렌디닝(Michael Glendenning) 대표. /사진=데일리NK

마이클 글렌디닝(Michael Glendenning) 커넥트북한 대표는 “우리는 탈북민들의 영국 정착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목적을 두고 있다”며 “첫째, 탈북민들의 복지 활성화 둘째, 자유 활성화 셋째, 국제사회에서의 네트워크 활성화”라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된 통역 지원이나 정신 상담뿐만 아니라 기타·댄스·요가·요리 교실 등을 운영하는 것은 복지 활성화 프로그램에 해당한다. 그리고 탈북민들의 취업을 위한 영어 교육이나 자격증 취득 과정 지원 등은 자유 활성화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들이다. 특히 전문 자격증 취득 프로그램은 근래 들어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글렌디닝 대표는 “회계, 제약, 교사, 엔지니어 등 관심 있는 분야의 자격증 취득을 원하면 영국인 멘토를 연결해주고 필요한 교육들도 지원하고 있다”며 “한 탈북민은 우리 단체를 통해 제약 관련 자격증을 따고 NHS(National Health Service·영국 보건의료서비스)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는데 그런 사례들을 보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올해에도 탈북민 한 분이 에어컨 정비 자격증을 땄고 보다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됐다”며 “한 탈북민의 성공 사례가 재영 탈북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탈북민 정착 지원 NGO ‘커넥트북한'(Connect: North Korea) 사무실 한편에 내걸린 게시물. /사진=데일리NK

커넥트북한에서 일하고 있는 탈북민 이예진 디렉터는 “대학 진학을 원하면 영어나 수학 등 과목별로 필요한 레벨까지 도달할 수 있게 지원해 드린다”며 “탈북민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맞춤형으로 지원하니 큰 호응도 얻고 있고 결과도 좋다”고 소개했다.

현재 커넥트북한은 자유 활성화 네트워크((Enabling Freedom Network) 프로그램 일환으로 탈북민이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하는 장학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선정된 대상은 1만 5000 파운드 정도 되는 학비와 항공료 등을 지원받게 된다.

이에 대해 글렌디닝 대표는 “탈북민들이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됐다”면서 “더 많은 탈북민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커넥트북한이 이렇듯 탈북민들의 정착과 성장에 초점을 두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건 튼튼한 재원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커넥트 북한은 전체 재원의 20% 정도를 런던 킹스턴 구의회 즉 공공기관에서 지원받고 있고, 71%는 영국 내 자선단체, 나머지 9%는 개인 모금을 통해 조달하고 있다.(데일리NK 기획취재팀=하윤아 기자, 장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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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