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19년 탈북 모자 사망 사건, 2022년 탈북 여성 고독사 사건 등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부적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지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데일리NK는 ‘탈남'(脫南)해 제3국행을 택한 탈북민들에게서 한국 사회 부적응 원인을 살펴보고 탈북민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원과 노력이 무엇인지 진단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해외 지역 최대 탈북민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는 영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난민으로 정착한 영국에서 정치에 뛰어들다
“탈북에 여러 번 실패했어요. 베이징 한국 대사관으로 가려고 했는데 못 했고 몽골로 가서도 실패했죠. 청도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도 찾아가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 앞에서 중국 공안이 여권이나 신분증 검사를 하더라고요. 통과할 수 없으니 어느 상점에 들어가서 한국 영사관에 전화했어요. 영사관으로 갈 수 있게 좀 도와달라고 했죠. 그런데 그 직원이 하는 말이 영사관 안으로 들어와야 도와줄 수 있다고, 바깥에 있으면 도와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한마디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서러움이었죠.”
한국에 대한 첫 느낌이었다. 박지현 씨는 결국 북한을 떠난 지 10년 만인 2008년 영국에 도착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중학교 수학 교사로 일했던 박 씨는 군에 갔던 남동생의 탈영으로 북에서 살 수 없게 되자 남동생과 언니네 가족들을 데리고 탈북했다. 탈북을 권유한 사람은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였다. 도강에는 성공했으나 박 씨는 인신매매로 팔려 가 중국인 남성과 강제 결혼했고 동생은 다시 북송됐으며 언니네 가족은 지금까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에 도박과 폭력을 일삼던 중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유일한 가족이자 삶의 희망으로 여기며 살았지만,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중국 공안에 의해 북송됐다. 북송 후 집결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다리가 썩어 들어가 죽게 됐을 때 수용소에서 쫓겨났다. 그 후 아들을 찾기 위해 또다시 탈북했다. 여러 탈북민과 몽골행을 시도한 것이 실패한 뒤에는 다시 베이징에 숨어들어야 했다. 지금의 남편은 당시 몽골행을 함께 했던 탈북민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불법체류자를 강제 연행해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데 혈안이었다. 중국을 떠나야 했지만 아이까지 데리고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없었던 박 씨는 결국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으로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 자유롭게 마음껏 이동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지역과 지역을 옮겨 다녀도 여행증명서 찾는 사람도 없고 누구 집에 가서 잔다고 해도 숙박 등록 안 하잖아요.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시간 아무 때나 갈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좋았던 건 ‘투표권’이었어요. 영국에서 투표를 처음 했을 때가 잊히지 않아요. 저나 남편은 북한에서 투표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정장 차려입고 새벽부터 투표장에 나갔어요. 그런데 문이 닫혀있는 거예요. 당연히 사람들이 투표장에 줄 서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당황했죠. 나중에 보니 사람들이 편하게 와서 투표하더라고요. 자유롭게 투표할 권리 이게 참 소중하게 느껴져요.”
박 씨도 다른 탈북민들처럼 영국에 처음 왔을 때 언어가 가장 힘들었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어도 할 줄 알았고 북에서는 러시아어도 배웠지만 영어는 너무 생소했다. 알파벳조차 알지 못했다. 정착한 맨체스터 지역에 홍콩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그들과 중국어로 소통할 수 있었어도 한계를 느꼈다.
“큰아들이 영국에 와서 사립학교 입학시험을 봤어요. 사립학교 보낼 능력은 안 됐지만, 시험 볼 수 있는 기회는 주니까 경험상 시험을 보게 했죠. 그런데 합격통지서가 왔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장학금 신청서도 함께 왔는데 그걸 몰랐어요. 장학금을 신청했으면 사립학교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부모가 영어를 모르니 기회를 놓친 거죠. 그때 영어를 모르면 앞으로 놓칠 기회가 너무 많겠다고 생각했어요.”
박 씨는 우선 영어 공부에 집중했다. 그리고 탈북민들이 영국 때문에 정착에 실패하지 않도록 ‘커넥트 북한’(Connect North Korea, CNK)이라는 비영리단체에서 탈북민을 위한 주민센터를 개설해 정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어 교육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탈북민이 영국에 와서 난민 신청을 할 때 3번의 인터뷰를 거쳐야 해요. 먼저 홈오피스(Home Office, 내무부)에서 북한 출신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고 변호사 인터뷰를 하고 나중에 최종 인터뷰까지 통과해야 난민 인정을 받을 수 있죠. 통역이 있어도 북한 상황을 잘 모르니 한계가 있어요. 설명을 잘 못해서 인터뷰를 통과하지 못하는 탈북민들을 보면서 영어를 할 수 있으면 반박할 수 있을 텐데 싶었죠. 영국까지 와서 영어 때문에 기회를 박탈당하고 다시 돌아가선 안 되잖아요.”
2017년부터 북한의 아동과 탈북 여성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징검다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박 씨는 지난 2021년 5월 탈북민 출신 최초로 영국 지방선거 구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거주지인 맨체스터 베리(Bury) 지역의 홀리루드(Holyrood)구 보수당 후보로 올해까지 세 번 선거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사실 코로나가 저한테는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어준 것 같아요. 코로나 때 영국 사람들 대부분이 당황하고 두려워했어요. 그때 요양원에 마스크 기부하고 다른 탈북민들과 쌀과 라면 사서 갖다 드리고 했는데 그때 영국인들이 ‘난민들이 우리나라 정책에서 이제는 난민들이 우리를 돕는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동안 난민으로서 난민의 목소리만 냈는데 그 얘길 듣고 이제는 영국 사회를 돌아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참 힘든 인생을 살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지탱할 수 있는 사람들, 지지대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저도 누군가가 간절하게 바라는 그 순간에 하나의 지지대가 되고 싶어요.”
한반도 트라우마, 정체성, 그리고 정치
“한반도 자체가 저한테는 엄청난 트라우마였어요. 15년 전의 저는 남과 북을 떠나서 한반도와 관련된 얘기라면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영국에 와서도 북한 사람이라는 걸 언급하고 싶지 않았고요. 치유되지 않은 아픔이 많았어요. 역사 교사셨던 아버지가 탈북하면서 반역자의 아들이 됐죠. 북한은 성분으로 직업이 결정되는 사회였는데 어리니까 그걸 모르고 군에 입대하려고 했어요. 근데 반역자 딱지 때문에 군입대도 못했죠. 한국에 와서 보니 한국도 북한 사람들을 군대에 안 보내주더라고요. 지금은 이해하지만 당시에는 남과 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느낌이었어요.”
영국 의회 내 초당적 북한 인권 관련 의원 그룹인 APPG-NK(UK ALL-Party Parliamentary Group on North Korea)의 행정관으로 일하고 있는 티모시 조는 북에 있을 때 꽃제비로 살았다. 2004년 중국으로 탈북한 후 공안에 잡혀 감옥에 수감됐을 때는 북송이 두려워 매일 울기도 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감옥에 찾아와 북한 대사관에서 나온 사람들인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한국 정부에서 나온 외교관이었다. 기적적으로 중국 정부가 그를 필리핀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해 북송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조 씨는 2008년 영국에 도착했다. 사실 영국에서 난민 신청 후 거쳐야 하는 인터뷰도 그에겐 괴로운 일이었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되짚어야했기 때문이었다.
“난민 신청을 하면 인터뷰를 하는데 북한에 있었던 사실, 중국 감옥에서 생활했던 이야기 등 기억을 되살려서 이야기하는 게 힘들었어요. 첫 인터뷰 심사에서는 거절당하기도 했어요. 중국에 있었다고 하니까 조선족인 줄 알았던 거죠. 통역이 잘못된 거였어요. 비자 받기까지 1년이 걸렸는데 비자를 받은 뒤에는 성인이니까 당연히 일을 해야 했죠. 말이 안 되니까 피자가게 전단지를 돌리고 맨체스터에 있는 한국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영국에 온 지 몇 년 뒤에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조 씨. 그는 2012년 치과의사가 되려고 대학에서 생물, 화학, 물리 같은 과목들을 공부했다.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내가 이 공부를 해서 뭘 하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 유튜브에서 한 탈북 청년이 ‘영어만 할 수 있다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 고발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걸 봤어요. 그 말이 밤새 귀에서 울렸죠. 그래서 기도했어요. 내가 누구인지, 내가 거쳐온 사회는 무엇인지 알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됐어요. 근데 책을 한 장 넘기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한 교수님은 제가 쓴 에세이를 보고 네 영어 실력으로는 절대 패스 못 한다고 했어요. 영국 대학은 단호해요. 성적을 쉽게 주지 않아요. 정말 눈물을 쏟으며 공부했어요. 나중에는 그분이 수고했다고 안아주시더라고요.”
정치외교학으로 석사까지 마친 후 영국 국회에 인턴으로 지원할 기회가 생겼다. 3차까지 48명이 합격해 실무 면접을 진행했는데 지원자 모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같은 내로라 하는 명문대 졸업생들이었다.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조 씨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면접에 임하기로 했다.
“마지막 인터뷰 때 ‘나는 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것 같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나보다 훨씬 공부를 많이 한 친구들이고 난 영어도 부족하다. 그런데 나는 이 친구들이 사교육을 받을 때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살아남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살아남는 과정에서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난관을 극복했는지를 배웠다.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심사하던 분이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그리고 일주일 뒤에 11명이 통과했는데 저도 선택을 받았어요. 남과 북을 통틀어서 처음이었죠.”
국회에서 활동하면서 영국에도 가난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한부모 가정에서 어렵게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는 걸 보게 됐다. 상황은 다르지만 힘겨웠던 자신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영국이든 북한이든 정치의 시작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영국 보수당의 맨체스터 테임사이드(Tameside)의 덴튼 사우스(Denton South)구의 후보로 올해까지 세 번째 선거를 치렀다. 워낙 노동당이 우세한 지역이라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조금씩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
“세 번째 선거까지 계속해서 득표율이 높아졌어요. 스스로도 자신감이 생겼고 선거와 정치에 대해서 몸으로 배울 수 있었죠. 저는 자유가 없는 폐쇄된 독재 국가에서 살아남았고 이렇게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에서 선거에 도전하고 있잖아요. 지역 주민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북한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데일리NK 기획취재팀=하윤아 기자, 장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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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