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밖 북한] 레인 빅토리호에서 다시 생각한 한국전쟁

미국 LA 샌페드로항에 정박해 있는 레인 빅토리호(SS Lane Victory). /사진=강동완 동아대 교수 제공

저는 지금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장을 계기로 샌페드로 항에 정박해 있는 레인 빅토리호(SS Lane Victory)​를 찾아 왔습니다. 공교롭게도 방문한 날은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날을 ‘전쟁이 끝난 날’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것은 평화협정이 아니라 정전협정이었습니다. 총성이 멈췄을 뿐 한반도는 지금도 정전 상태에 있으며, 6·25전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레인 빅토리호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건조된 미국의 ‘빅토리선(Victory Ship)’ 가운데 한 척입니다. 빅토리선은 전쟁 물자를 신속하게 수송하기 위해 대량 건조된 화물선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한국전쟁에도 투입되었습니다. 레인 빅토리호 역시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며 유엔군의 작전을 지원했고, 특히 1950년 흥남철수작전에도 참여했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철수하면서 군인뿐 아니라 수많은 북한 주민을 남쪽으로 이송한 대규모 해상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여러 척의 군함과 수송선이 작전에 참여했으며, 레인 빅토리호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흥남철수작전을 이야기할 때 가장 널리 알려진 배는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원래 화물선이었지만, 단 한 척의 배에 약 1만 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무사히 항해했습니다. 무장도, 의료시설도, 충분한 식량도 없던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피난민도 적의 공격으로 잃지 않았고, 항해 중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난 건 기적에 가깝지요. 이 항해는 오늘날 ‘기적의 크리스마스 선박(The Christmas Miracle Ship)’으로 불리며 인도주의 역사에 길이 남아 있습니다.

레인 빅토리호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만큼 널리 알려진 건 아닙니다. 그러나 두 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흥남철수작전을 완성한 역사적 증언대입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기적 같은 피난민 구조를 상징한다면, 레인 빅토리호는 유엔군의 병력과 물자 수송, 그리고 피난민 철수에 함께 참여하며 작전 전체를 떠받친 또 하나의 핵심 축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중국에 고철로 팔려 이제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메인 빅토리호가 우리에게 더 소중한 가치로 안겨 오는 것 같습니다.

배에 오르기 전, 저는 한동안 승선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1950년 겨울 그 경사로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자유를 향한 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끝내 넘지 못한 생과 사의 경계였기 때문입니다. 배에 오른 자와 남은 자의 경계는 이산가족이 되었고 그 아픔은 지금도 이어집니다.

갑판 위에는 약 7000명의 피난민이 머물렀던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넓고 조용하지만, 전시관에 전시된 당시 흑백 사진 속 갑판에는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의지한 채 차가운 겨울 바다를 건넜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관람객에게는 하나의 전시 공간이지만, 당시 피난민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은 흔히 전투와 전략, 무기체계 중심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전쟁의 본질은 사람입니다. 흥남철수작전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도 군사작전의 성공 때문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의 생명을 구해냈기 때문입니다.

정전협정 체결 70여 년이 지난 오늘, 레인 빅토리호는 단순한 박물관이 아닙니다. 이 배는 한국전쟁이 아직 역사 속 사건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계속 현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정전협정일에 레인 빅토리호를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승패를 기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자유를 선택했던 사람들의 용기와 국제사회의 연대,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한반도의 과제를 함께 기억할 때 비로소 한국전쟁은 현재를 비추는 역사로 남을 것입니다.

한 가지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우리 정부나 민간단체에서 이 배를 구입해 한국으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산 역사의 현장으로 6·25를 기억하는 데 이보다 더 뜻깊은 장소는 없을 듯합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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