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19년 탈북 모자 사망 사건, 2022년 탈북 여성 고독사 사건 등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부적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지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데일리NK는 ‘탈남'(脫南)해 제3국행을 택한 탈북민들에게서 한국 사회 부적응 원인을 살펴보고 탈북민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원과 노력이 무엇인지 진단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해외 지역 최대 탈북민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는 영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탈북민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으로 영국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한국을 거쳐 영국으로 온 대다수 탈북민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탈남’(脫南)의 이유는 ‘차별’과 ‘괄시’였다.
한국에선 탈북민이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따돌림과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지만, 다민족·다문화 사회인 영국에서는 남에서 왔든 북에서 왔든 같은 ‘코리안’으로 인식되고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출신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는 게 재영 탈북민들의 말이다.
처음부터 부자가 되겠다는 목표로 한국을 떠나온 것은 아니기에 큰돈을 손에 쥐지는 않아도 차별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에 만족하며 영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들이 있다.
차별 견디기 힘들어 영국행… “영국은 빨리 자립할 수 있도록 유도”
올해로 영국 생활 16년 차가 됐다는 김성철 씨. 그는 199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파견 노동자로 일하다가 자유를 꿈꾸고 탈북해 2000년대 초반 한국에 정착했다. 그러나 탈북민에 대한 차별에 좌절을 느끼고 2007년 영국행을 택했다.
“한국에 3년 있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구미 공단에서 TV 수상관을 만드는 공장에 취업했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차별하더라고요. 나이도 훨씬 어린 사람들도 탈북자라고 무시하고 깔보고. 같은 민족끼리 너무하더라고요. 차별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어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대형 면허 따서 할부로 25톤 화물차를 사서 운송업을 했어요. 울산에서 포천이나 파주까지 싣고 가고 거기서 인천 연안부두 찍고 다시 또 울산이나 부산으로 내려오고. 1년 동안 그 일을 했는데 많이 힘들었죠.”
한국 생활이 힘에 부치던 차에 영국에 먼저 와 있던 하나원 동기의 권유에 한 달 만에 한국 생활을 정리했다. 김 씨가 영국에 온 2000년대 중반에만 해도 북한에 살았다는 점만 확인되면 난민으로 인정받아 6개월 만에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제가 왔을 때는 비자가 빨리 나왔어요. 6개월 만에 비자를 받았죠. 난민 신청을 하고 나면 조사를 받아요. 정말 북한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거죠. 북한 사람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면 비자가 나왔어요. 난민으로 인정받기 전엔 일을 할 수 없지만 국가에서 매주 보조금도 나왔어요. 아내와 둘이 해서 70파운드 정도를 받았어요. 난민으로 인정 받으면 하우징 베네핏(housing benefit)이라고 월세 90%를 국가에서 지원해주는데 그게 정말 큰 도움이 되죠. 한국에서 주택이나 지원금을 주는 것도 정착에 큰 도움이 됐지만 비교하자면 영국은 매주 딱 필요한 만큼만 돈을 주면서 빨리 자립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같아요.”
영국 정착에서 가장 힘든 점은 역시 언어였다. 은행에 가서 계좌를 개설하고 세금을 내는 행정적인 일을 처리해야 할 때는 머리가 하얘지기도 했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영어로 증상을 말해야 하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언어 때문에 탈북자들이 처음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트 같은 곳에서 많이 일해요. 저도 처음에 와서는 한 한국 식료품점에서 배달 기사로 2년 일했고 또 다른 한국 식료품점으로 옮겨가서 8년 동안 일하다 지금 회사로 왔어요. 지금은 트루월드푸드(True World Foods)라는 대형 수산물 유통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몸이 고되긴 하지만 차별이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일한다는 점이 만족스럽죠.”
현재 골프를 취미로 하고 있다는 김 씨는 “은퇴 후 아내와 함께 영국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pension)을 받으며 여유롭게 살고 싶다”며 “큰 욕심은 없고 여기서의 안정적인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한국선 출신 속여가며 일해…영국선 한인들 도움받아 잘 정착
“일단 한국에선 탈북민이라고 밝히면 회사에서 뽑아주질 않아요. 결국 억양이 조금 비슷한 강원도 속초가 고향이라 속이고 면접을 봤더니 붙었어요. 나중에 사장이 아무래도 조선족 같다는 거예요. 여기 한국 신분증 있지 않냐고 보여줘도 갸우뚱해요. 적응하고 자리 잡은 다음에 사실 나 북한 사람이라고 얘기하니까 왜 말을 안 했냐고 하더라고요. 북한 사람은 조선족보다 낮게 보고 뽑지도 않고 월급도 적게 주니까 그랬다고 했죠.”
영국 생활 15년 차 최중화 씨의 이야기다. 취업도 취업이지만, 최 씨가 경험한 한국 생활은 그야말로 ‘답’이 없었다. 새벽부터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벌이가 충분치 않았다. 더욱이 아이들 교육비까지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다. 70세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해도 대학 공부까지 시킬 수 있을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곳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힘들게 살 바에 차라리 다른 나라로 가자 싶었다.
“처음엔 뉴캐슬에 배정을 받았어요. 언어가 안되니까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죠. 페인트칠하고 집수리하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 정착 발판을 만들려면 일단 한국 사람들이 있는 데로 가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뉴몰든)로 왔어요. 언어 때문이었죠. 영국 사회의 체계나 시스템, 구조가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니까 행정 처리를 하려고 해도 어려웠어요. 사회도 알고 정보도 얻으려면 말이 통하는 한인들 밖에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여기서 한인들과 탈북민들은 대부분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인데, 그런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북한에서 했던 일로 여기서 살 수 없잖아요. 새로운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데 한인들에게 도움받아 잘 정착한 부분이 있죠. 한인들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했다면 영국에서 힘들었을 거예요.”
수년째 한국 식료품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최 씨. 그는 현재 아내와 함께 삼남매를 키우고 있다. 둘째와 셋째는 영국에서 나고 자랐고, 첫째는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4살 때 영국에 와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하다. 아이들이 학업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커가는 모습을 보며 영국행을 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언어적인 문제로 아이들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없다고 느낄 때면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되돌아보기도 한단다.
“사실 아빠로서 인생을 가르쳐 주고 싶어요. 그런데 이게(말이) 안 돼 답답할 때가 있죠. 그래서 가정 회의를 자주 해요. 그때마다 학교생활은 어떤지, 엄마 아빠한테 서운한 것은 없는지 묻죠. 때로는 우리와 가깝게 지내는 다른 탈북민 가정의 아이를 데려다가 통역을 붙여 대화하기도 해요. 서로 설명도 하고 설득도 하고 맞춰가는 거죠.”
최 씨는 무엇보다 영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기를 원한다. 이를 통해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어떻게 얻게 된 것인지도 기억했으면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간혹 북한 영화를 보여주기도 하고 북한의 실상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왔고 거기서 군 생활도 했고, 형제는 얼마나 있고, 너희 사촌들은 북한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아이들도 크면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 하는 말이 ‘아빠는 저런 곳에서 살았는데 여기까지 온 것 보면 대단하지 않니? 영어를 못해도 이렇게 영국에서 살아남은 걸 봐봐. 그게 정말 용기 있는 거야’ 하면서 ‘너희는 이렇게 용기 있고 생명력 있는 사람들의 후예들이야’라고 해요.”
어엿한 대학생이 돼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최 씨의 첫째 아들은 취재진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아빠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지금도 가족들을 위해 지금도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일하시는 것을 보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서로 원하는 것이 달라 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빠를 사랑한다. 아빠가 북한에서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말해주셨는데, 기회가 된다면 북한 인권 활동도 돕고 싶다”고 말했다.(데일리NK 기획취재팀=하윤아 기자, 장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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