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19년 탈북 모자 사망 사건, 2022년 탈북 여성 고독사 사건 등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부적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지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데일리NK는 ‘탈남'(脫南)해 제3국행을 택한 탈북민들에게서 한국 사회 부적응 원인을 살펴보고 탈북민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원과 노력이 무엇인지 진단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해외 지역 최대 탈북민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는 영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초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6월 초, 영국 내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런던 교외의 뉴몰든 지역 중심가(하이스트리트) 한식당들에는 K-푸드의 인기를 증명하듯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뉴몰든역에서부터 쭉 이어지는 하이스트리트를 걷다 보면 비빔밥, 삼겹살 등 익숙한 음식을 파는 한식당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중에는 탈북민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들도 있다.
이 지역은 영국에 정착한 한인과 탈북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어 ‘통일촌 뉴몰동’이라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탈북민들 가운데 이제 어엿한 ‘사장님’이 돼 자기 사업장을 운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이스트리트 중심부에 위치한 ‘KCAfé’가 바로 그중 하나. 소불고기, 참치마요 등 한국의 여느 김밥 전문점 못지않은 다양한 종류의 김밥은 물론 떡볶이, 어묵 등 분식류와 각종 김치, 나물, 장아찌, 멸치볶음 등 밑반찬을 팔기도 하는 이 가게는 탈북민 이정희 씨가 직접 운영하는 가게다.
이 씨는 한국문화예술원(Korean Culture & Arts Centre) 건물 한편을 임대해 지난해 7월 이 가게를 열었다. 현재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직원들도 모두 탈북민들이다.
청사초롱과 영국 국기 유니언잭이 함께 내걸린 가게 입구를 들어서니 ‘통일주방’이라 적힌 오픈형 주방에서 김밥을 말고 있는 직원, 내부 한편에서 직접 재료를 손질해 만든 반찬을 포장하느라 여념이 없는 직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점심 장사 준비로 한창 바쁠 무렵 영국인 여성이 유아차를 밀며 가게로 들어왔다. 반찬 냉장고 앞에서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비빔밥용 나물 반찬을 집어 들었고 계산대로 와 삼각김밥 하나를 추가로 주문했다.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그는 “김치, 파전과 같은 한국 음식을 좋아해 이곳까지 일부러 찾아왔다”고 말했다.
뒤이어 들어온 한 영국인 남성도 자연스럽게 메뉴에 있는 음식들을 주문했다. 한국인 아내를 둔 그는 “아내가 이곳 음식을 좋아한다”며 삼각김밥과 잡채를 포장해갔다.
가게 사장 이 씨는 “손님의 80%가 영국인들”이라고 귀띔했다.
정오가 지나자 이번엔 한국인 손님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가게 전면 유리창에 붙여 놓은 ‘평양냉면 개시’라는 글씨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들어온 이들부터 김밥 한 줄과 꼬치 어묵으로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우려는 이들까지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 때문에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한국 교민 금동식 씨는 “탈북민이 운영하는 한식당이라고 해서 선입견을 갖지는 않았다”며 “사장님이 친절하셔서 이곳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금 씨는 “탈북민들이 영국에 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초반에는 스트러글(struggle·분투)도 있었지만, 지금은 잘 정착한 것 같다”며 “(탈북민들이) 워낙 성실하고 부지런해서 식당이나 이사, 딜리버리(배송) 이런 분야들을 꽉 잡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뉴몰든 하이스트리트 중심부에 있는 또 다른 한식당 ‘YAMI’. 돼지갈비, 삼겹살, 닭갈비 등 다양한 종류의 한국 음식을 선보이는 이곳은 뉴몰든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식당 중 한 곳으로, 탈북민 이수현 씨가 운영하고 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임에도 가게 안은 테이블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꽉 차 있었고,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들도 각양각색이었다.
이 식당을 찾은 한국 교민 박남석 씨는 “음식이 다양하고 맛이 있는데 가격이 저렴하기까지 해서 인기가 많다”며 “회식 같은 모임을 할 때도 자주 찾는 편”이라고 말했다.
‘뉴몰든에 최근 탈북민이 운영하는 한식당이 많아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냐’는 질문에 박 씨는 “탈북민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한국식 음식도 잘하고 중국 스타일의 음식도 잘하는 것 같다”며 “일반 한식당보다 조미료를 덜 쓰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문을 열어 오히려 자주 찾게 된다”고 했다.
이뿐만 아니다. 몰든 로드(Malden Rd)에 위치한 한국 식료품점 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있는 ‘금강식당’도 탈북민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점심시간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영국인 남성 2명이 스시와 샐러드 등 여러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일식당 분위기가 물씬 나는 가게에서는 트와이스, 뉴진스, 아이브 등 K-pop 가수들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실제 이 가게의 주력은 각종 스시와 롤 등 일식 메뉴들이지만 알탕과 같은 한식 메뉴들도 손님들이 꾸준히 찾는다고 한다.
뉴몰든에서 스시 맛집으로 통한다는 금강식당 사장 김민 씨는 영국에서 식당을 운영한 지 10년이 넘은 베테랑 요식업자다. 이 가게는 김 씨의 두 번째 사업장으로, 그는 5년 전 한국인으로부터 이곳을 인수해 코로나 시기에도 문을 닫지 않고 꾸준하게 가게를 운영해왔다.
‘코로나 시기에 가게를 운영하기 힘들지 않았냐’ 묻자 김 씨는 “목숨 걸고 탈북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코로나 못 이겨내겠는가. 그 정도는 신경 쓸 정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웃어 보였다. 영국 정부의 자영업자 지원정책도 있었지만 배달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전략이 주효했다는 게 김 씨의 말이다.
이곳 금강식당은 내달(8월) 뉴몰든 하이스트리트 중심부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다.(데일리NK 기획취재팀=하윤아 기자, 장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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