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김일성 고향이 ‘만경대’가 아니라고요?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4월 2일 “제1차 선전부문일꾼강습회 참가자들이 평양시 안의 여러 곳을 참관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김일성 주석의 만경대고향집과 만경대혁명사전관 등을 둘러봤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북한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연구할 때 특히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 소년기다. 1945년 집권 이후는 물론 만주 항일무장 부대, 소련 붉은 군대 복무 시절의 김일성에 대한 행적은 중국과 일본 및 소련 사료들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빨치산 부대 창설 이전 시절에 대한 사료는 매우 부족하다. 필자는 최근에 ‘김일성 전기’라는 도서를 쓸 때 이 문제를 접근하였다. 당시 찾았던 연구 방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일단 이 시대 사료는 극소수이지만 분명 존재한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김형직은 가족과 함께 만주에 망명했다. 그래서 일본 경찰 기록에서 반일 운동가인 김형직에 대한 언급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기록을 통해 김형직이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재산도 파악해 볼 수 있었다. 1925년 기준으로 김형직 가족의 재산은 1000엔 정도였다. 이는 만주에서 2년간 벌어야 얻을 수 있는 평균 소득보다 조금 높았다.

동시대 기록 외 또 하나의 중요한 사료는 김일성 가족을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그중 핵심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와 이용상 시인이다. 김형석은 어렸을 때 김형직 가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이용상은 김일성 동생 김영주에 대해 ‘삼색의 군복’이라는 책을 통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조선총독부 정무국 기록에서 김형직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이 책을 통해 김영주가 일본군 통역원이었던 점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의 우수한 일본어 능력을 1945~1946년 김일성 가족 하인으로 근무한 고바야시 가즈코의 회고록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1960년대 초반 북한 도서를 들 수 있다. 역사 연구자 입장에서 이 시기는 참 흥미로웠다. 이 시기 이제 김일성 숭배는 강화됐지만 공식 담론은 형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시기 후에 사라져 버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1960년 평양에서 출판한 ‘만경대’라는 도서를 통해 김일성의 출생지는 만경대가 아니라 인근 ‘칠골’이라는 마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64년 나온 ‘노을 비낀 만경봉’이라는 책을 보면 김형직이 김룡호라는 입양아들이라는 뒀고, 김일성 보다 한 살 많은 김룡호가 ‘수령님’의 이복형이었던 사실을 알 수도 있다. 물론 나중에 북한 도서에서 김룡호에 대한 언급은 사라졌다.

북한 역사에 김일성만큼 중요한 인물은 없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사실들이 관련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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