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코로나19에 대응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폐쇄 정책을 시행하던 2020년 가을, 주민들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모든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것도, 이웃 마을에 다녀오는 것도, 심지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이런 국가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하면 ‘위험분자’로 몰렸기에 누구 하나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당시 발생한 양강도 김형직군의 영예군인(상이군인) 사건은 국가 정책에 불만을 드러내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으로 주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강원도에서 장기간 복무하다 영예군인으로 전역한 그는 고향인 양강도 김형직군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읍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한 리(里)의 집체 격리 시설로 강제 격리됐다. 그러나 그곳은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을 갖추지 못한 곳이었다. 식량과 땔감이 부족한 것은 물론 위생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이 군인은 금방 전역한 군인의 패기로 자신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을 대변해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실제 그는 방역 담당자에게 항의하며 격리 시설의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의견을 냈으나 그의 행동은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됐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다 몸을 다쳐 영예군인으로 전역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국가 정책적으로 이뤄진 방역 조치에 공개적으로 불만이나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북한에서 용납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국가적 조치에 순응하지 않고 의견을 내는 것 자체가 정권,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별도의 관리시설로 이송됐고, 이후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사건이 있은 지 4년 가까이 됐지만 이 영예군인의 행방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양강도에서 그처럼 격리 시설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주민들은 모두 주민등록 문건 상 ‘병사’(病死) 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형직군의 한 주민은 “격리 시설의 열악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것에 큰 대가를 치른 것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주민은 “그 당시 영예군인처럼 의견을 내 위험분자로 몰린 사람들은 그저 먹을 것과 땔감, 약을 좀 달라고 제기한 것일 뿐이었다”며 “집단을 대표해 의견을 표명한 이런 사람들은 우리 같은 평백성들에게는 영웅이었지만, 국가로서는 반체제 선동분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주민들은 ‘영예군인이 이렇게 처리되는데 하물며 아무 힘도 없는 주민이 의견을 제기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입을 닫았다. 양강도 역시 당시 주민들 속에서 불만이 제기된 사건들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철저히 입단속해 실태가 외부 세계에 전달되기는 어려웠다.
영예군인의 남아있는 유일한 가족인 홀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사라진 이후부터 눈과 귀가 서서히 멀고 정신도 희미해져 지난해 봄 49호병원(정신병원)으로 이송됐다. 이송 당시 홀아버지는 ‘내 아들이 지금 강원도에서 군사 복무 중“이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사정을 아는 주변 이웃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