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허수아비 백두혈통’ 김일성 동생 김영주의 부고

김일성 사망 후 열린 기념식 때 주석단에 모습을 드러낸 김영주의 모습. /사진=노동신문 캡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사망하였다. 북한 간부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며 북한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본 칼럼은 그의 부고(訃告)다.

김영주는 1920년생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미국 대통령은 우드로 윌슨이었고,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였다. ‘소련’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김영주가 얼마나 긴 인생을 살아왔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영주의 고향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였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그의 아버지는 탄압에 못 이겨 부인과 아들들과 함께 만주에 망명하였다. 바로 이 이국 땅에서 김영주는 태어났다.

만주도 결국 일본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1931년 제국의 육군은 만주에 침공하였고 점령에 성공하였다. 김영주의 형들인 김성주(김일성)와 김철주는 결국 중국공산당 산하 무장 항일 부대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김영주의 선택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일본 군대에 민간인 번역가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름도 김일선(金日鮮)으로 바꾸었다. 김일선이라는 이름은 ‘일본과 조선’이라는 뜻이었고 천황폐하께 충실한 조선인 신민(臣民)에게 잘 어울렸다.

1945년 제국의 패배를 김일선은 경성에서 맞았다. 다시 김영주가 된 그는 이제는 김일성이 된 형이 살아 있고 38선 이북에 높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소식에 무척 기뻐하였다. 서로의 적을 위해 싸웠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부모도, 형제인 김철주도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김일성에게도 김영주에게도 남아 있는 가족은 서로뿐이었다. 그렇게 결심한 김영주는 형을 만나러 평양으로 떠났다.

김영주는 형의 마음을 잘 알았다. 김일성은 동생과 만나 기뻐했다. 그렇게 김영주는 평양에서 살게 되었다. 1945~46 김일성 집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처녀는 김영주의 탁월한 일본어 능력에 매우 놀라워했다.

1950년대부터 김영주는 형의 부하로서 높은 간부가 되었다. 당 중앙위 조직부 부장이 된 그는 형의 뜻에 따라 1950년대 후기 야권 소멸 캠페인을 관리하였다.

이렇게 1960년대 김영주는 승승장구하는 간부처럼 보였다. 1961년 그는 중앙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6년에 그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겸 중앙위 비서가 되었다. 1970년 당(黨) 제5차 대회에서 그는 정치위원회 위원 11명 중 한 명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김영주가 나중에 김일성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쿠바의 사례에서 우리는 형에서 동생에게 권력 계승이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김영주 인생의 정점은 아마도 1972년이었다. 1972년 4월 13일 김영주는 로동신문에 형의 위대성에 관한 커다란 이론적 논문을 게재하였다.

몇 달 후 남북 역사상 첫 번째 공동 성명인 7.4 남북공동선언은 공포되었다. 한국과 북한 사이 불가침 조약 역할을 하는 이 선언을 서명한 사람은 바로 김영주였다. 그러나 2년 후에 김영주는 갑자기 몰락하였다.

1974년 2월 김일성은 후계자로 아들 김정일을 지정하였다. 이와 함께 김영주는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부장에서 정무원 부총리로 강등되었다. 이후 약 1년이 지난 1975년 여름 북한 매체에서 김영주가 사라졌다.

김영주가 다시 등장된 시대는 1990년대였다. 나이 많은 김일성은 특이하게 자비(慈悲)를 보여주었다. 김영주도 이제 절대 김정일의 권력 승계를 막을 수 없다고 본 셈이다. 그렇게 1993년 북한 국가 부주석 자리 중 하나를 받게 되었다.

아무 실권이 없는 김영주는 이따금 북한 매체에서 등장하였다. 1994년 형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그는 주석단에도 나왔지만, 2011년 조카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장의위원 232명 중 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김정은 시대까지도 이 마오쩌둥과 조금 닮게 보이는 노인은 북한 TV에서 나온 적이 있다. 마오 주석과 달리 김영주는 훨씬 건강하게 보였고 그의 가슴엔 형과 조카의 초상화가 있는 휘장을 달려 있었다.

김영주가 사망했을 때 북한 지도부에서 비상 토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도 자제를 해야 할까? 초상화를 게재해야 할까? 그리고 김영주가 김일성의 동생이었던 사실을 드디어 인정해야 할까?’를 판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로동신문에서 나온 글은 참으로 스탈린 시대와 어울렸다. 당 중앙위 기관지는 이 사람이 누구의 동생인지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그의 초상화도 게재하지 않았다. 또한 전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생략하였는데, 갑자기 김정은을 찬양하는 표현은 넣었다.

김영주는 101세였다. 북한에서 드문 나이다. 만주에서 형 김성주와 보냈던 나날들은 물론, 북한 역사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김영주의 사망과 함께 이 기억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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