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칼럼] 북한 ‘통일 지우기’에 대한 손익 계산서

2023년 8월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하에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8기 제7차 확대회의가 당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진행됐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남측 지도를 펼쳐놓고 “전쟁 준비를 공세적으로 더욱 다그치라”고 지시했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 관계에서 문재인 정부 시기만큼 여러 차례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특히 2018년에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면서 한반도에는 오랜만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어 남북 관계에 큰 이정표를 세우듯 3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아 2020년 6월 돌연 김여정 제1부부장에 의해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남북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관계는 경색된 채 긴장감이 돌고 있다.

2024년이 들어서자, 북한의 대남 강경정책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북한은 지난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를 열고 이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헌법에 있는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이제는 삭제돼야 한다”라고 하며, 남한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간주하는 내용을 명기하라고 지시했다. 이 밖에도 이날 회의에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 협력국, 금강산 국제관광국을 폐지했다.

이러한 김정은 위원장의 선택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일고 있다. 우선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느슨한 남북 관계에서 북한으로 스며드는 남한의 문화와 민주주의가 싹트는 것은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한의 드라마를 몰래 시청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또 한 가지는 북핵개발과 고도화에 따른 국제사회의 압박과 한미일 연합훈련 등 자신들을 향한 위협에 대해 전면적 승부수를 띄어 내부 결속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를 통해 더욱 강력한 통제와 주민들로부터의 높은 충성도를 기대할 수 있지만, 손익계산은 좀 더 신중하게 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의 통일 지우기는 남한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북한의 통일노선은 줄곧 남남갈등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남한 내에 무수히 많은 친북 단체가 북한의 그럴듯한 통일노선과 이념을 앞세우고 활동해 왔으나 북한의 통일노선이 사라짐에 따라 그들의 활동공간이 축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반대로 남한의 친북세력들이 그동안 내면에 감춰온 전략을 숨길 필요성이 사라짐에 따라 보다 노골적인 활동과 극단의 종북세력으로 진화해 자신들의 활동 범위를 넓혀갈 수도 있다. 북한의 통일 지우기에는 이러한 대남전략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북한의 급작스러운 대남 적대정책 변화에 따른 가장 큰 위 협은 북한이 남한에 대한 무력도발과 군사적 충돌마저도 이제는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종합해 보면, 북한이 그동안 이어온 통일노선은 남한과의 극한 대결을 불사하겠다는 김정은에게 하나의 장애물로 인식된 결과일 수 있다.

과거 북한의 통일노선은 해방 이후 한반도의 분단과 동시에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6.25전쟁 이후 북에 주둔한 중공군과 소련군을 철수시킴과 동시에 남한에 남아 있는 미군마저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줄곧 해 왔다. 특히 미군을 한반도의 점령자로 간주하고 남한을 해방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들의 대남 통일노선은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외세의 간섭이 없이 한반도의 자주권을 확보한 채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통일노선이었다.

과거 북한 김일성은 자신의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평화통일’과 ‘민족대단결’을 내세웠다. 그는 1948년 3월 신년사에서 “조국통일의 기본방침을 자주적으로, 민주주의적 원칙에서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북한의 통일노선은 국내외에서 광범위하고 집요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가운데 그들이 목적 달성을 위해 동원된 ‘위장전술’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위장전술’이 남한을 향해 사용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자신의 체제구축을 위해 ‘민족해방’이라는 통일방안을 북한의 인민들에게도 그대로 주입시켜 왔다. 다시 말하면 ‘민족해방’을 내세우며 북한 주민들을 모호하게 속이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데 사용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에게도 통일에 대한 막연한 목적과 가치가 심겨 있는 것 또한 불가피한 사실이다. 어쨌든 북한의 통일전선은 그들이 세습을 이어가며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최근 김정은 위원장이 선대 지도자들이 새겨놓은 ‘통일’을 부정하고 지우기 시작한 것은 그동안 북한 체제가 쌓아 올린 통일전선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위장술을 통해 주민들을 속여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지금 북한 주민들의 사상이 흐트러지고 체제가 불안해질 것을 우려하는 것에 대해 남한의 드라마나 K-POP 등 한류문화의 유입이 원인이라하기 이전에 북한 주민들에게는 통일이라는 기본적 가치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비록 거짓 선동이었을지라도 주민들에게 주입된 북한의 대남 통일방안에는 ‘민족’, ‘동포’, ‘해방’과 같은 그들만의 통일인식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돌변해 눈에 보이는 통일을 모두 지울 수는 있겠지만 북한 주민들 마음속 새겨진 통일을 지우려 함으로써 적지 않은 혼란을 감수하며, 김정은이 원하는 주민들의 결속과 강한 충성심을 끌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제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에서 경제, 정치, 외교 등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카드를 버리고 또다시 ‘벼랑끝전술’을 펴고 있다. 그동안 그들이 사용해 왔던 그 전술에서 어떤 성공을 했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챙겼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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