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북송으로 북한 온성, 신의주 보위부 집결소에 구금된 경험이 있는 탈북민 이영주 씨. 그는 지난 20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중국 내 탈북민 다수가 강제북송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과거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신의주 보위부 집결소에 구금됐을 때 계호원들이 중국에서부터 숨겨온 돈을 한 장이라도 더 찾겠다고 혈안이 돼 탈북민들이 입고 있던 속옷은 물론 일회용 생리대까지 뒤지는 모습에 ‘내 조국이 이렇게 비참한 곳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북송 후 보위부 집결소, 단련대, 교화소 등 구금시설들을 거치며 지옥 그 자체인 북한의 민낯을 또렷하게 보게 된 이 씨는 지난 2018년 자신이 경험한 두 번의 북송과 세 번의 탈북 이야기를 담은 <김정은도 꼭 알아야 할 진짜 북한의 속살>이라는 책을 펴냈다. 지난해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유 돈 노우’가 개봉되기도 했다.
이 씨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1년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자 자격증도 취득했다. 현재 그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북한의 인권 실태를 알리기 위한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끔찍한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사명이 아니겠냐”는 게 그의 말이다.
아래는 이 씨와의 인터뷰.
–강제북송된 탈북민들이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게 확인되면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진다고 들었다. 한국행을 시도했는데 어떻게 수용소행을 피할 수 있었나?
“정말 감사하게도 온성에 있을 때 중국 공안으로부터 내 자료가 넘어오지 않았고, 신의주에서도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서 관리소(정치범수용소)행을 면했다. 보위부 집결소에서 조사가 끝나면 본래 거주지 관할의 수감 시설로 이송된다. 기가 막힌 것이 북한은 수감자들을 호송할 때 드는 버스비나 기름값을 수감자 개인이 부담하게 한다. 담당 보안원이 집에 찾아가서 ‘당신 딸을 지금 신의주 단련대에서 데려와야 하니 차비랑 식비 얼마를 내라’고 해서 돈을 받아온다. 내가 감옥에 가고 싶어 가는 게 아닌데도 나라가 돈이 없으니 모든 걸 개인이 내는 것이다.”
–강제북송됐을 때 어린아이도 있었나.
“엄마랑 같이 잡혀 온 3살짜리 어린아이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함께 북송되면 아이는 친척집에 보내거나 고아원으로 보내서 엄마와 분리해 놓는다. 신의주 감옥에 있을 때는 막달이 가까워져 온 임산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낮에 그 여자를 데리고 나가서 낙태 주사를 맞혔다. 그리곤 그날 밤에 끙끙대고 아파하더니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아이를 낳았다. 그 아기 시체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어디다 버리고 오더라.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은 끔찍한 일을 내 두 눈으로 본 거다. 다시 생각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힘든 기억이다.”
–처음 북송돼 온성 보위부 집결소에 구금됐을 때가 2006년, 17년 전이다. 보위부 집결소 시설이나 위생 상태 또는 수감자에 대한 인권 의식이 그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지금 북한의 경제 사정이나 인권 상황들을 보면 17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코로나를 지나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더 힘들어졌고 통제는 더 강화됐다. 북한이라는 나라는 국가가 돈이 생긴다고 수감 시설을 개선하는데 돈을 쓰는 곳이 아니다. 탈북한 사람들을 조국을 배신하고 떠난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그런 짐승한테 인권이라는 게 어딨냐는 인식을 가진 곳이다. 17년보다 더 열악하고 끔찍한 환경이 됐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두 번의 북송을 겪고서도 한국에 왔다. 강제북송으로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는 희망적인 사례이지 않을까 싶은데.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나도 경험했기 때문에 더 아프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국에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살아라.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버텨라. 그리고 살아나와서 세상에 소리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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