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Out NK] 북한 군사정책은 6·25 트라우마의 발로(發露)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7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차 전국노병대회에 참석해 직접 연설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8일 1면에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김정은이 휴전협정일(7.27) 67주년 전날인 7월 26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회 전국노병대회에 참석해 “모든 면에서 대비조차 할 수 없었던 전쟁에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제(미국)와 추종 세력의 공세를 막아낸 것은 세계혁명사에 전무후무한 특대 사변”이라고 연설했다.

김정은이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은 휴전협정일을「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전면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1951년 7월 10일 휴전을 위한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2년여에 걸친 지루한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김일성은 비열하게도 모두가 단잠에 취한 일요일 새벽,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전면 공격을 하여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남진했으나, UN군과 한국군에 의해 패주를 거듭하여 자강도 만포까지 쫓겨 갔다. 이후 중국이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구호 하에 참전(1950.10.25.)함으로써 한숨을 돌린 김일성은 이른바「별오리회의」(1950.12.21)에서 전쟁의 패배를 자인하는 한편 그 원인을 부하들에게 전가하였다.

사실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휴전 20주년이 되는 1973년에 느닷없이 7월 27일을「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로 부른 데 이어, 43주년인 1996년에는 국가적 명절로 지정했다. 그러면서 중앙보고대회를 비롯하여 경축 공연과 노병대회, 전승기념탑 참관 등 각종 축하 행사를 벌이고 있다.

북한이 휴전협정일을 전승일로 왜곡한 배경에는 김일성의 독재 권력 장악이 자리하고 있다. 김일성은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1972년 12월 이른바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여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독재 권력을 확고히 하는 우상화 작업의 하나로 ‘전승기념일’ 지정이라는 역사 날조를 했다. 그러면서「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과 같은 건축물도 건립했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은 1974년 4월 보통강 기슭의 52,000㎡ 부지(敷地)에 건립되었는데, 항일무장투쟁시기관, 조국해방전쟁시기 작전관, 미제침략자들의 만행관, 조국해방전쟁승리관 등 80여 개의 전시실이 있다.

하지만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평양시 중구역 해방산동에 개관한 기념관의 이름은 동일한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라는 명칭이 없이「조국해방전쟁기념관」이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전쟁 승리’라는 자평(自評)은 후일에 가필한 역사 왜곡일 뿐이라 하겠다.

한편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은 휴전 40주년인 1993년 7월 26일, 대규모 열병식을 동반한 제막식을 갖고 세워진 구조물이다. 김일성은 이 기념탑을 “영웅 전사들의 위훈을 보여주는 로천박물관”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중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김일성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으며 지금의 3대 세습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북한은 7․27 보고대회 때마다 “피로써 도와준…” 운운하며 중국에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이번에 김정은도 “(중국은) 피로써 도와주며 전투적 우의의 참다운 모범을 보여줬다”라며 “중국군 열사와 노병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라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승절’ 67주년을 맞아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 참전열사묘를 참배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지난달 27일 보도했다. 박정천 총참모장 등 군 지휘부가 김 위원장을 수행했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이 같은 6·25의 경험은 이후의 북한 군사정책에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첫째, ‘4대 군사 노선’이라고 불리는 군사력 강화 정책이다. 4대 군사 노선은 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1962.12)에서 채택된 정책으로 ‘전인민 무장화’, ‘전국 요새화’, ‘전군 간부화’, ‘전군 현대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김일성이 별오리회의에서 패전의 원인과 함께 대책 방향으로 제시한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둘째, ‘미국과의 전쟁은 절대 불가하다’라는 것이다. 북한은 ‘조선(북한) 인민의 철천지 원쑤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자!’ 등으로 미국과의 전쟁 불사를 호언하고 있지만, 이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동일 뿐 정작 ‘백두혈통’ 당사자는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미국 의회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을 촉구하는 편지를 채택(1974.3)한 것을 비롯해 끊임없이 정전 체제의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북한 권력자의 이런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더불어 한반도 통일 문제–평화적 방법이든 전쟁 방식이든–를 ‘민족 내부 문제’로 몰아가는 것도 이 같은 불순한 저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끝으로, 북한이 6·25에서 얻은 가장 쓰라린 교훈은 ‘기회가 있을 때 완벽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른바 통일대전은 ‘단 한 번이자 마지막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만 발생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어설픈 도발은 자제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북한의 이런 입장은 한반도를 긴장 고조 상황으로 몰고 갔다가 슬그머니 물러섰던 ‘목함지뢰 사건(2015.8)’이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상황관리를 위해 전선 총격 등의 국지적 도발이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발사와 같은 무력시위(示威)로 긴장 분위기를 조성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은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에서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타승(打勝)했다’라면서 휴전협정일을「전승절」로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 또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주장일 뿐이다. 오히려 선공(先攻)에도 불구하고 쓰라린 실패로 끝난 6·25의 트라우마가 대를 이어 유전되는 가운데, 이런 정신적 외상이 북한의 군사정책과 전략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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