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Out NK] 불가불가(不可不可), ‘대북전단살포금지법’

▲ 지난해 12월 14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대북전단을 금지하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됐다. /사진=연합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 등 범여권이 구랍(舊臘) 14일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쳐 재석 의원 187명에 187명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북한에 대한 확성기 방송이나 전단 살포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에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일명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라고도 불린다. 이 때문에 야권에서는 ‘김여정 하명법(下命法)’이라고 비판하고 또 시민단체들이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헌법소원과 같은 법적 행동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는 등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특히 이번 개정법안은,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뿐 아니라 북한 주민의 ‘알권리’까지 차단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나씩 살펴본다.

먼저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은 위헌적 요소가 있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르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그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률은 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적절성, 법익의 균형성, 제한의 최소성 등을 지켜야 하는데, 이를 ‘비례의 원칙’ 또는 ‘과잉금지의 원칙’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원칙을 준수하지 않은 법률(법률조항)은 기본권 제한의 입법적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서 당연히 헌법에 위반된다.

그러면 이번 개정법안은 왜 비례의 원칙에서 벗어나는가? 개정안에 신설된 제24조의 제목은 ‘남북합의서 위반행위의 금지’이다. 남북합의서는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국제법상의 조약이 아니다. 이와 관련 헌법재판소는 “남북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임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 합의 문서로서 (…) 남북당국의 성의 있는 이행을 상호 약속하는 일종의 공동성명 또는 신사협정에 준하는 성격을 가짐에 불과하다”라고 판시한 바 있다. 대법원도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해야 할 공동의 정치적 책무를 지는 남북한 당국이 각기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상호 간에 그 성의 있는 이행을 약속한 것이기는 하나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고 판시한 바 있다.

바꿔 말하면, 남북합의서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한) 남북의 지도자 사이에 맺은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약속을 근거로 하여 국민의 행동을 제한하고, 처벌까지 하는 조항을 신설한 이번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은 비례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20.6.16)하여 남북관계를 판문점 선언(18.4.27) 이전 시기로 돌려놓는 등 기왕의 남북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위헌적 요소가 있는 개정안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통일부는 “한국의 군사분계선을 따라 거주하는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지척에서 북한군이 대한민국 공무원을 살해하고 시신까지 훼손하는 것을 바라만 보았고, 총·포격 정도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참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북한 핵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정부 여당이 새삼스레 ‘주민의 안전’을 운운하는 것은 구차하다 못해 민망하기까지 하다.

대북전단금지법
국내 27개 북한 인권단체가 지난해 12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헌법 소원을 제출했다. / 사진=단체 제공

더불어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라고도 불리는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에 내포된 보다 심각한 문제점은 북한 주민들의 「알권리」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유럽에서는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지난 천 년간 인류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을 선정한 적이 있다. 그런데 1위에 오른 인물은 셰익스피어·톨스토이와 같은 대문호나 뉴턴·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 또 칸트·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가 아니라 뜻밖에도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였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을지로 골목의 작은 인쇄업자에 불과한 인물이 지난 천 년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 선정된 것이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금속활자가 발명되면서 일반인들도 특수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가능(이른바 인텔리겐치아의 출현)해짐으로써, 중세의 암흑시기를 깨트리고 르네상스의 융성을 가져왔으며 현재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대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아는 것이 힘’(프랜시스 베이컨)이고, ‘정보가 힘’(앨빈 토플러)이었던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당(黨)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절망적인 구호 아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는 것은, 당국에 의해 모든 힘의 원천인 지식과 정보의 습득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구절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다수의 힘으로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을 강행 통과시켜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실상을 알려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를 차단했다. 기회만 있으면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 보호를 강조하던 정권이 정작 2,50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눈을 가려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의회에서는 청문회 개최 얘기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영국과 유럽연합(EU)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국제사회의 비판이 뒤따랐다. 특히 미 국무부는 ‘북한으로의 자유로운 정보 유입을 증진하는 것은 미국의 우선순위 사안으로서, 북한 주민들이 북한 정권에 의해 통제된 정보가 아닌 사실에 근거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미 국무부가 다른 국가의 특정 법안에 대해 가타부타 입장을 밝힌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한국의 대북전단금지법과 미국의 북한인권법 간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의 북한인권법은 라디오를 비롯해 이동식디스크, 메모리카드, 동영상 및 음성 재생장치, 휴대전화 등을 이용해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정보를 접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부는 “전단 배포와 관련한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은 북한 주민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권 운동에 제한을 가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에 마지못해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그동안의 행태로 볼 때 그다지 진정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국민의 생명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개정된 이번의 남북관계발전법은 국민의 ‘표현의 자유’ 제한 → 비교 안목을 키우는 지식의 북한 유입 차단 → 북한 주민의 자유를 향한 의지 형성 방해 → 독재 권력 세습 체제의 무기한 연장이라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이런 내재적 문제점으로 인해 제정되어서는 안 될 ‘불가불가(不可不可)’한 법률을 정부와 여당이 ‘불가불, 가(不可不, 可)’로 둔갑시켜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다수의 횡포이자 폭거일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소수자 인권 보호와 평등’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군부 독재 반대’를 무한반복적으로 재생하는 진보 정권이, 정작 민주주의 최고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자유’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대단히 인색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위선자들에게 ‘껍데기는 가라’고 일갈(一喝)하던 신동엽 시인을 패러디하고 싶어진다.

껍데기 진보는 가라! 그리고 1960년 중앙청과 1980년 광주 금남로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자유혼(自由魂)이 북한으로 흘러가게 하라. 그리하여 그저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아니라, 북한 땅에도 자유와 풍요가 넘쳐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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