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난해 개최한 조선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당규약을 변경하면서 ‘인민대중제일주의’ 정치를 사회주의 기본 정치방식으로 정식화했다. 인민대중제일주의는 김정은이 제4차 당 세포비서 대회(2013.1)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인민대중제일주의”라고 말하면서 처음 등장한 정치구호다.
그리고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노동당 제8기 제4차 전원회의(2021.12.27.~31)를 개최하고, 경제문제, 특히 농촌발전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은 “농업생산을 증대시켜 식량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을 농촌발전전략의 기본과업”이라고 규정하면서 곡물·축산·과일 등의 향후 10년 생산목표를 밝혔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우선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한편 북한 외국문출판사는 올해 초 「위민헌신의 길에서 2012-2021」이라는 제목으로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 10년간의 현지 시찰 사진들을 수록한 화보집을 발간했다. 화보집은 과학기술, 인민 생활, 건설, 재해복구 등의 순서로 카테고리를 나눠 구성되어 있는데, 북한이 올해의 핵심 사업으로 꼽은 ‘먹고 사는 문제’와 연관된 시찰 모습도 비중 있게 실었다.
특히 2015년 7월 평양남새과학연구소 현지 시찰 장면을 비롯해 양어장, 농장, 식품공장, 방직공장, 화장품공장, 백화점 등 주민 생활과 관련이 있는 다양한 분야를 현장에서 챙기는 모습을 부각했다.
그러면서 “인민들의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가시는 곳마다 과학 농사, 다수확 열풍의 불길을 지펴주시고 축산물과 수산물, 과일 생산을 늘리고 양어, 양식을 대대적으로 하도록 하시어 험한 산발과 풍랑 세찬 바닷길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헤쳐오신 김정은 동지”라며 추켜세웠다.
하지만 인민대중 제일주의든, 위민헌신이든,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 우선 해결이든 이 모두는 현재의 채취 수준 경제방식으로는 ‘말로만’의 정치적 선전 구호라 할 것이다.
올해의 알곡 생산 전망만 해도 그렇다. 최근 북한 기상수문국(우리의 기상청)은 지난달 전국 기온이 평년보다 2.3℃ 높았으며 강수량은 평년의 44%에 그쳤으며, 특히 북한의 대표적 곡창지대인 황해북도, 황해남도와 함경남도 일부 지역의 강수량이 매우 적었다고 밝혔다.
심상치 않은 봄 가뭄으로 알곡 생산목표에 경고등이 들어오자, 북한 당국은 내각 전원회의 확대회의(4.20)를 열고 “모내기와 김매기를 비롯한 영농사업에 모든 역량과 수단을 총동원할 데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노동신문 등 북한의 선전 매체들도 미사일 발사 소식 대신 가뭄 문제를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노동신문(5.8)은 “가물(가뭄) 피해막이는 단순히 농작물을 지키는가, 마는가 하는 실무적인 사업이기 전에 당의 권위 보위전, 사회주의조국의 존엄 사수전”이라며 “모두 애국의 마음 하나로 합쳐 농작물을 지켜낼 것”을 촉구했다. 신문은 다음 날에도 “농사는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 짓고 과학이 짓는다는 철석의 신념과 의지를 만장약(가득 채움)하고 자연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하여 강력한 대책을 세우고 있다”라며 지역별 대응 사례와 △물주기 과제 수행 △양수설비 가동률 증대 등의 구체적 방안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공장과 기업소, 각종 사업장의 종업원은 물론이고 성(省)과 중앙기관 일군 등 평양에 거주하는 이른바 ‘화이트칼라’와 부녀자들까지 가뭄 피해를 막기 위한 사업에 총동원되었다. 이뿐 아니다. 김정은이 ‘건국 이래 가장 대동란’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모내기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인력과 장비의 총동원을 독려하고 있다. 이들은 논밭 주변에 땅을 판 뒤 비닐을 깔아 물을 채우는 임시 웅덩이를 만들어 논밭에 물을 대고, 농작물에 각종 비료와 성장촉진제를 뿌리는 등 가뭄 피해 최소화 전투에 나섰다.
이는 김정은이 집권한 지 10년 되도록 내세울 만한 경제 실적을 올리지 못한 상황에서 알곡 생산까지 차질을 빚어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이 더욱 어려워질 경우, 이른바 위대한 지도자의 권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 것이다.
문제는 알곡 생산 감소에 따른 식량 부족이 비단 올해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3대에 걸친 김씨 일가의 통치 기간 내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허울만 그럴듯한 주체농법에 기인한 것이다.
주체농법은 ‘위대하고 영원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알곡 증산을 위해 창안한 농법이다. 주체농법에 따라, 산지를 무분별하게 개간하여 다락밭을 만들고 밀식(密植) 재배를 하여 일시적으로 알곡 수확이 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산림이 황폐하여 가뭄과 홍수 피해를 고스란히 입는 천수답(天水畓)이 되었다. 여기에 밀식 재배는 지력을 떨어뜨려 생산성까지 감소했다. 약 4천 년 전에 중국의 우(禹)는 황하를 잘 다스린 공로로 임금까지 되었지만, 북한 주민들은 21세기에 살면서도 자연의 자비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단백질을 쉽게 제공할 수 있는 어로(漁撈) 부문도 마찬가지다. 2016년 겨울, 강원도 동해에 도루메기(도루묵)가 몰려든 적이 있었다. 남북이 함께 풍어를 이뤄 어선마다 만선이었다.
그러자 김정은은 ‘5월27일수산사업소’, ‘1월8일수산사업소’, ‘8월25일수산사업소’를 잇달아 방문하여, “최근 며칠 사이 수천 톤의 도루메기를 잡았다는 희한한 물고기 대풍소식을 듣고 인민들에게 한시바삐 전하고 싶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왔다”, “비린내를 맡으니 기분이 상쾌해진다”라고 만족해했다.
도루묵 풍어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김정은은 “인민군대의 수산부문 일꾼들과 어로전사들이 물고기를 많이 잡은 비결은 황금해 역사를 창조하자는 당의 호소를 심장으로 접수하고 당의 사상과 의도를 실천으로 받들어가는 길에서 비상한 각오와 결사관철의 정신을 높이 발휘한 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물고기는 가까운 바다에서도 잡고 먼바다에서도 잡으며 나가면서도 잡고 들어오면서도 잡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이 ‘물고기를 많이 잡으려면, 작은 고기도 잡고 큰 고기도 잡아야 합니다. 가까운 바다에서도 잡고, 먼바다에 나가서도 잡아야 합니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조손(祖孫)이 그야말로 ‘하나마나 한’ 말을 교시(敎示)라고 한 것이다.
한편 북한 보도 매체들은 “5월27일수산사업소는 김정은의 지시로 건설된 것으로, 수산물 생산과 어로공들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조건과 환경이 최상의 수준에서 갖추어진 선군시대의 또 하나의 자랑찬 창조물”이라고 선전했다.
당시 도루묵이 풍어를 이룬 것은, 도루묵의 개체를 늘리기 위해 강원도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한 수산자원회복사업이 성과를 거둔 결과인데, 북한은 이를 김정은의 치적으로 포장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해에 도루묵의 어획량이 감소하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자 그대로 도루묵이 된 것이었다.
경제난으로 통치자금이 부족해진 김정은은 조업권을 중국에 넘겼다. 대규모 중국어선이 동해로 진출하자, 이에 밀려난 북한 어로공들은 제시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10m 내외의 목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생사를 걸고 어로작업을 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어선이 일본에 표류·표착한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2018년 225건, 2019년 156건에 이르렀다. 이뿐만 아니라, 표류하다 결국은 굶어 죽은 시신이 잇달아 발견되기도 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의 농업은 천수답 수준에 불과하여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고, 어업 또한 중국에 밀려 목숨을 건 ‘이삭줍기’를 하고 있다. 이 모두는 김씨 일가의 독재 권력 유지를 위해 나라의 주인인 인민들을 수단으로 하는 정책을 펼친 결과이다. 새삼 강조하거니와, 인민대중 제일주의·이민위천은 처음부터 실천 의지가 전혀 없는 구두선(口頭禪)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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