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서론: 북한은 왜 헌법까지 바꾸었나
2023년 말 김정은은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고 규정했다. 당시만 해도 이를 단순한 대남 압박용 수사나 일시적 긴장 고조 차원의 발언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북한 개정 헌법은 이 발언이 단순한 정치적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헌법에서 기존 통일 관련 표현을 삭제하고, 영토조항을 신설했으며, 남측을 ‘대한민국’으로 명시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북한의 국가적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이번 개정 헌법에서는 기존에 사용되던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한다’는 표현이 삭제됐다. 또한 북한 영토를 ‘북쪽으로 중국·러시아와,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한 영토’라고 규정하는 조항이 새롭게 포함됐다. 북한 헌법에 영토조항이 신설되고 대한민국이 명시된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변화다. 이는 최소한 북한이 남북관계를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북한은 헌법까지 개정하며 남북관계의 성격을 다시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와 정책은 여전히 과거의 통일 담론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Ⅱ. 본론
1. ‘통일 삭제’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재정의다
이번 북한 헌법 개정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부분은 통일 관련 표현 삭제였다. 그러나 실제로 더 중요한 부분은 북한이 남북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다시 설명하고 있는가에 있다.
북한은 오랫동안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 관계’로 규정해왔다. 실제 정책과 별개로 헌법과 대외 선전에서는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 변화는 이러한 기존 서사의 수정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영토조항 신설과 대한민국 명시는 남북관계를 사실상 별개의 국가 체계로 설명하려는 흐름과 연결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물론 이를 곧바로 ‘북한이 통일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현재까지 공개된 내용만으로 북한의 장기 전략 전체를 확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이 기존의 통일 담론 비중을 축소하고 있으며, 남북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2. 헌법 개정은 체제 메시지다
헌법은 단순한 법률 문서가 아니다. 국가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보여주는 정치적 선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북한 헌법 개정은 단순한 문구 수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북한은 이번 개헌 과정에서 국무위원장의 국가수반 지위를 보다 명확히 하고, 핵 관련 권한을 헌법적으로 정비했다. 또한 일부 표현에서는 기존 사회주의 혁명 서사보다 국가 운영 체계 정비에 가까운 흐름도 확인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북한이 국가 체계와 대외 메시지를 보다 일반적인 국가 형태로 정리하려는 움직임 아니냐고 해석한다. 물론 이 역시 확정적 결론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북한이 내부 체제와 대남 메시지를 동시에 조정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흥미로운 부분은 김정은이 과거 언급했던 ‘대한민국을 제1 적대국으로 명시하라’는 수준의 강경 표현은 실제 헌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북한이 적대적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국가 대 국가 형태의 관리 가능성을 일정 부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3. 그런데 한국 정책은 얼마나 달라졌나
반면 한국 사회의 정책 언어는 상대적으로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통일부를 중심으로 한 대북 메시지는 여전히 평화, 대화, 협력 중심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평화는 반드시 필요한 가치다. 문제는 평화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변화된 현실에 대한 설명과 분석이 충분히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있다. 정책은 희망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상대의 변화와 전략을 정확하게 읽고 대응할 때 비로소 설득력을 가진다.
특히 일반 주민이 체감하는 북한 인식과 정책 메시지 사이의 거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일반 주민은 북한을 과거처럼 단순한 통일 대상으로만 바라보기보다, 안보와 군사 문제 속에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 만나는 북향민들은 최근 북한 내부 분위기 변화와 대남 인식 변화를 빠르게 체감하고 있다. 반면 정책 담론은 여전히 과거의 통일 프레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필요한 것은 ‘통일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 변화된 현실 속에서 남북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관리하고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논의다.
4. 이제는 정책 프레임 점검이 필요하다
이번 북한 헌법 개정은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상대는 남북관계를 설명하는 언어와 체계를 조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기존의 정책 프레임을 얼마나 점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 대응이나 성급한 단정이 아니다. 오히려 냉정한 현실 인식에 기반한 전략적 접근이다. 단기적으로는 충돌 관리와 위험 통제 역량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는 통일 가능성과 남북관계 변화를 함께 준비하는 복합적 전략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통일부 역시 역할 변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단순히 평화를 강조하는 기관이 아니라, 변화된 남북관계를 분석하고 국민에게 설명하며 정책적 선택지를 제시하는 기관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커질 가능성이 있다.
Ⅲ. 결론: 현실이 바뀌면 정책 언어도 바뀌어야 한다
북한 헌법 개정은 단순한 법률 개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통일 관련 표현 삭제, 영토조항 신설, 대한민국 명시 등은 북한이 남북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을 조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이를 두고 북한의 장기 전략을 단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하다. 북한은 이미 기존과 다른 언어로 남북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대응이다. 여전히 과거의 전제 위에서 정책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변화된 현실을 기반으로 전략을 다시 점검할 것인가.
평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평화 역시 현실 인식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낙관도 비관도 아니다. 변화된 현실을 정확하게 읽고, 그 위에서 새로운 정책 언어와 전략을 준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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