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노 칼럼] 북한이 국장(國葬)으로 보낸 두 인물의 의미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4일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전날(3일)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4일 김영남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전날(3일) 97세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조문한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고, 장례가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고도 밝혔다. 북한이 그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춘 이유는, 형식적으로 오랫동안 ‘2인자’의 지위를 유지한 김영남이 최고지도자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모범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트라우브(David Straub)는 김영남을 두고 필자에게 “마치 ‘걸어 다니는 노동신문’ 같은 남자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트라우브는 2009년 8월,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기자 2명을 석방시키기 위해 빌 클린턴(Bill Clinton)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방북한 바 있다.

스트라우브에 따르면, 클린턴을 만난 김영남은 날씨나 문화 같은 무난한 이야기만 꺼냈다. 클린턴이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제기하자, 김영남은 “저도 조선(북한)의 입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이어진 주장은 “노동신문 사설을 그대로 읽은 것과 같았다”(스트라우브)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을 일당 지배하는 조선노동당이 관영지에 실어 온 내용을 충실히 반복했다는 의미다.

스트라우브는 김영남에 대해 “그는 늘 외워둔 내용만 말했다. 체구가 크고 목소리도 묵직했다. (형식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포함한) ‘2인자’ 직책이 그에게 맡겨진 것도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영남은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리셉션에서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한국 정부 관계자는 “이 접촉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김영남은 들은 말을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어 “그렇다고 대화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김영남에게는 자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북한이 국장으로 예우한 또 다른 인물로 강석주 전 당 비서가 있다. 그는 2016년 5월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2002년 제2차 북핵 위기 당시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미 국무부 차관보와의 회담 등 지난 25년 동안 북한 외교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핵심 외교 전략가였다.

강석주는 당 국제부 과장 등을 거쳐 1984년 45세의 나이에 외무성 제1부상으로 임명되며 북한 외교의 실무 지휘를 맡았다. 그를 잘 아는 북한 소식통은 “성격은 소탈하면서도 동시에 대담했다”고 회고한다.

초면의 사람에게도 거만하지 않고 친근하게 대했으며, 여러 사람이 함께 식사할 때는 술잔이 비어 있지 않은지 눈여겨보고, 모두가 고르게 말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화제를 돌리는 등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그는 미국뿐 아니라 소련(러시아)과 중국 정세에도 밝았고, 그의 어학 능력은 미·소, 미·중, 중·소 관계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누구나 긴장하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앞에서도 주저 없이 자신의 분석을 솔직하게 펼쳤고, 이런 솔직함은 그가 총애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를 널리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1994년의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였다. 합의 후 귀국한 강석주는 당 중앙위원회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내가 조선을 떠나기 직전까지 위대한 김정일 동지가 세세하게 지시해 주셨고, 그것이 합의로 이어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미국의 양보를 이끌어낸 영웅으로 칭송받는 상황에서도 결코 공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다. 이 점이 ‘충성심’으로 평가되어 김정일의 더 큰 신임을 받았다.

또한 귀국 당시 기뻐한 김정일이 강석주에게 “오늘만큼 기분 좋은 날은 없다.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자, 강석주는 당시 외무성에서 승진이 막혀 있던 김계관을 언급하며 “그는 매우 유능한 인물입니다. 부디 그가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리를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김계관은 다음 날 외무성 부상으로 임명되었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신보다 부하를 먼저 챙겼다. 강석주는 남자 중의 남자였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일본 역시 김정일이 강석주를 깊이 신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 직전, 일본은 북한이 회담에서 납치 문제를 인정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류경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과 다나카 히토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간의 비밀협상 자리에서 “더 신뢰할 수 있는 핵심 인물을 참석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실제로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이가 바로 강석주였다.

김영남과 강석주는 모두 최고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김영남보다 강석주를 더 사랑했다. 강석주는 최고지도자뿐 아니라 부하들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강석주의 인간적 매력도 컸지만, 그 같은 태도를 허용했던 김정일의 포용력도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권력 승계 직후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 이복형 김정남 등을 연이어 처형하거나 암살했다. 이러한 공포정치의 결과로 사람들은 위축되었다. 앞으로도 김영남과 비슷한 유형의 인물은 등장할 수 있겠지만, 강석주 같은 인물은 더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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