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존엄성은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직시 되기 힘들다. 그것은 사회 발전과 사람들 간의 생각과 행위의 맥락 내에서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고독사나 무연고 사망자와 같이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수 이들의 모습이 쉬이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갖춰진 한국 사회는 존엄성의 훼손을 성차별이나, 갑과 을의 대립, 부와 가난의 차이에 기반한 수치심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존재론적 지위의 측면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법적 처벌 강화와 상시 모니터링 제도, 피해자 중심의 사건 처리 등의 절차적 문제를 보완하는 측면에서 개선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은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하나는 인간은 소중하다는 진리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그가 본래적으로 타고난 어떤 요소에 의해 다른 이와 비교하여 차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북한 사회에서 존엄성의 준수 정도는 어떠한가. 북한은 2019년 개정한 헌법에서 ‘인간 존엄성’과 관련한 부분(헌법 3조)을 삭제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개정 직전 담겨 있었던 헌법(2016년 6월29일) 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 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고 명시했다. 전문가들은 이 ‘사람중심의 세계관’이 곧 ‘인간의 존엄성’을 뜻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조항이 삭제되었기에, 북한의 법은 후퇴되었다고 평가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곧 국가의 책무성과 연결된다. 국가가 제도를 통해 주민들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것은 물론, 사회 인식 수준을 쫓아 차별적 행동을 근절하고, 인식 개선을 도모하며, 그릇된 행위에 적법한 수준의 처벌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 정권은 독재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속성으로 이러한 책무성을 다할 수 없는 구조이다. 그리고 ‘북한의 정상국가화’는 ‘존엄성’에 기반하여 재단되어야 할 것이다. 존엄성을 수호하는 정책 이행은 국제사회에서의 정상국가로서의 지위와 분명 연결되어져야 한다.
파병 북한군에 대한 소고
최근 생포된 러 파병 북한군이 주목받고 있다. 여러 기사를 종합한 바에 따르면, 북한 군인들의 파병은 본인 혹은 가족조차 모른 채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신분은 일부는 성분이 좋다고도 하고, 일부는 고도로 숙련된 보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파병된 그들에게 의사를 결정할 어떤 보호조치도 없다는 사실은 실상 그들이 러시아 측에 제공된 인간 ‘포탄’에 다름 아님을 보여준다. ‘입당청원서’를 품은 죽은 북한 군 시신이 발견되기도 하면서 과연 북한 당국의 ‘명분’없는 파병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되묻게 된다.
유엔 대표부는 이러한 사실을 발뺌할 뿐이고, 북한 당국의 결정의 맥락은 어디에도 알려져 있지 않다. 북한 사회 내에서 누구도 이를 설명하지 않고, 어떠한 정보도 공유되지 않고 있다. 북한 군인들에 대한 정보를 거짓으로 꾸미고 외부 세계에 북한 당국과의 연결성의 고리를 없애는데 러시아 당국이 가담함으로써 책무의 연루성은 짙어지고 있다. 국제정치의 주고받기 식의 정치적 셈법 아래, 18~24세의 약 1만 2000명 군인들이 쓰러지고 있다. 이는 국가의 책무성이 결여된 비정상적 국가의 또 다른 단면일 뿐이었다.(2024년 11월 19일, 전환기정의워킹그룹, ‘로씨야의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 동원된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파견 노동자에 대한 회고
2016년 러시아의 북한 해외 파견 노동자는 분신자살로 자신의 고충을 세상에 드러냈다. 하루 16시간 노동에 지쳤지만, 돌아갈 때는 번 돈을 품고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희망이 사라지자, 한글 유서를 남기고 몸에 불을 붙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극단적이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행하기까지 그가 겪었던 정신적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북한에 남겨진 이들에 비해서 더 나은 기회를 보장받았지만, 북한의 현실은 눈에 보이는 외부 세계와 비교될 뿐이고, 그리고 그러한 구속성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했을 누군가는 결론 끝에 분신을 감행했을지도 몰라, 그의 사건이 오랫동안 잊히질 않았다.
2016년 폴란드를 방문하여 노동 현장을 찾아 목격한 바로는, 북한 노동자들은 폴란드에 온 유럽의 다른 나라 이주노동자들이 수시로 쉬고, 자신보다 적은 일을 하면서도 풍족히 먹고, 자유로이 퇴근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집체적 생활에 발이 묶인 모습이었다. 극명히 비교되는 그 현장에 속한 그들이 내 눈에 보인 그 모습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고민에 휩싸일 기회가 최소한 그들에게는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3명만 모여도 정보원이 있을 수 있고, 내 잘못을 북한에 남기고 온 가족과 보증인에게 묻고, 매주 파견 현지에서도 진행되는 사상 교육에서 충성을 드러내야 비판받지 않을 수 있는 구조 속에서 한 발짝이나마, 혹은 한 입이나마 쉽게 뗄 수 있을까. 내가 겪지 않으면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국가가 이를 지시하고, 통제하고, 가해하고 있지 않는가.
나가며
생포된 북한 군인 한 명이 노출된 영상에서는 어디에 살고 싶은지를 소극적이나마 밝히는 그의 얼굴과 음성이 담겼다. 북한 병사는 송환될 경우, 반역자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이를 해결하는 것은 상황을 직시하고 방법을 모색 가능한 외부의 몫이다.
자유가 없는 공간에서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가. 북한에서 사는 이, 북한 밖에서 잠시 머문 이, 북한으로부터 아예 탈출해 나온 누군가는 위 세 가지 제약 속에 언젠가 놓였고, 여전히 놓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갔을지라도,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한다. 아직도 그러한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정보와 의견을 모으기 위해 만나고, 비교 분석할 수 있는 가용 능력이 부족한 상태의 북한, 그 속에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구책을 찾으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존엄이 없는 곳에서 존엄을 찾으라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정한 것이다. 북러 간의 주고받기식 정치적 셈법 아래 놓인 북한 군인을 주목하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누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에 공력을 들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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