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사령관 동지께서 뭐라 하셨는지 아니. 병사의 기본 도리는 조국을 위해 청춘을 바치는 것이라고 했어. 낳아준 어머니 당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배웠고. 기래서 나도 그 당에 충성을 맹세하고 군복을 입었더랬지. 근데 내가 군대 나와서 배운 건 최고사령관 동지의 말씀대로 살다가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어. 충성? 그거 썩어지게 하다가는 군의소(군 의료기관)에 끌려가서 감정제대(의가사제대)하기 일쑤야. 그치만 누구처럼 부모만 잘 만나면 대낮부터 위스키요, 얼음(마약)이요…”
21일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단편영화 ‘두 병사’ 속 ‘리광혁’이라는 인물의 대사다. 영화 속 리광혁은 보위원을 꿈꾸지만, 농장원의 아들이라는 낮은 출신성분 때문에 보위대학이나 군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반면 영화 속 또 다른 인물 ‘박진철’은 군단 정치위원인 삼촌 덕에 군복무를 하면서도 노트북,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대낮에도 위스키를 마신다.
영화 ‘두 병사’는 이렇게 두 인물을 대비시키며 출신성분으로 인한 북한 사회의 차별과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인민들의 삶을 비춘다.
“북한은 철저한 계급사회예요. 북한 당국은 인민 모두가 평등하게 주인으로서의 삶을 산다고 선전하지만, 권력이 없으면 어떤 노력을 해도 현실을 벗어날 수 없죠. 인민을 위한 인민의 나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인민의 희생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만 호의호식하는 나라라는 걸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죠.”
정하늘 감독은 첫 영화 연출작 ‘두 병사’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녹여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하전사로 민경(최전방)부대에서 근무하던 정 감독은 2012년 보초 근무를 서던 중 군사분계선(MDL)을 통해 남쪽으로 넘어왔다. 군 내에서의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기 힘들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는 차별적인 구조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현재 8만 구독자를 보유한 ‘북시탈TV’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정 감독은 북한 군대의 실상을 알리는 콘텐츠를 다수 제작하기도 했다. 유튜브를 통해 북한 사회의 이면을 들춰내온 그가 어떤 계기로 영화 연출에 도전하게 됐는지, 또 작품 속 숨은 의도와 촬영 뒷이야기까지 그를 직접 만나 들어봤다.
아래는 정 감독과의 인터뷰 일문일답
-기존에도 유튜브나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북한 군인들의 생활이나 군 문화 등을 알리는 활동을 많이 해왔다. 이번에는 영화다. 특별한 계기가 있나?
“오는 7월에 개봉 예정인 ‘탈주’라는 영화에 단역 배우로 출연하면서 동시에 북한말이나 군인들의 실제 생활에 대한 자문도 했었다. 이종필 감독님과 대화하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또 영화를 연출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알게 되고 매력도 느끼게 됐다. 언젠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통일미디어(UMG)에서 군 인권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연락이 왔다. 웹드라마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제안하고 12부까지 시나리오를 썼는데 호흡이 너무 긴 것 같다, 좀 더 간결하면 좋겠다고 해서 시나리오를 다시 각색해 단편영화로 제작하게 됐다.”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영화 속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이 어렵진 않았나?
“아무래도 경험했던 내용을 담는 거라 초안은 비교적 빠르게 썼는데 캐릭터를 생성하고 디테일한 대사를 쓰는 부분이 시간이 좀 걸렸다. 영화 속 진철이는 실제로 소학교 시절 친구였다. 우연히 군대에 가서 고향 친구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배경이 있는 친구였다. 신병 훈련을 받고 있는데 ‘너 몇 중대야? 내가 너 있는 데로 갈게’ 그러더니 정말 같은 중대 같은 소대로 왔다. 그 친구는 모든 훈련과 작업이 열외였고 뙤약볕에서 김매기도 당연히 안 했다. 정치지도원까지도 일개 하전사한테 쩔쩔맸다. 훈련 기간이었는데도 군 간부인 삼촌 집에 가서 놀다 오더라. 그 친구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른 것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영화 속 배우들이 북한말을 실제처럼 구현하던데 탈북민 배우들을 섭외한 것인가?
“아니다. 영화 속 배우들은 물론이고 스텝들까지 전부 남한 사람들이었다. 탈북민 배우를 섭외할 수도 있었지만, 북한을 잘 아는 사람들끼리 다 아는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 배우들이 북한을 잘 모르고 북한 말투도 100% 따라 하기는 힘들겠지만, 제작 단계에서부터 북한을 알리면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를 촬영하는 현장에 탈북민 친구가 한번 왔었는데 남한 출신 배우들과 스텝들이 북한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물어보고 알려주고 알아가면서 제작하는 그 현장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얘기하더라. 나도 신바람 나서 대답해주고 행복하게 영화를 촬영했다. 그 현장의 분위기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북한 말 교정도 직접 했는데 배우들이 북한 사투리를 너무 잘해서 나도 깜짝 놀랐다. 일반 상업영화의 유명한 배우들이 하는 북한 사투리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 탈북민들도 영화를 보여주니 하나 같이 물어보는 게 ‘어디서 이렇게 잘생긴 탈북민 배우를 섭외했냐’는 거였다. 그 정도로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줬다. 현장에서도 말투나 억양이 조금 어색하면 바로 교정을 해줬고 배우들도 잘 따라와 줬다.”
-영화 속에 나오는 소품 중에 위스키 짐빔이나 BMW 스포츠카 등이 눈에 띈다. 실제 북한 군인들이 접하기 힘든 물건인데 상표를 그대로 노출시킨 이유가 있나?
“의도가 있었다. 물론 북한에서는 일반 노동자일 경우 이런 물건들은 평생 구경도 못 하는 것들이고, 영화에서처럼 고위 간부를 친인척으로 둔 군인이라고 해도 접하기 힘든 것들이다. 하지만 북한은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한 사회다. 고위 당 간부일 경우 이보다 더한 사치품들을 사용한다는 걸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중간중간 ‘당과 수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라는 빨간 현수막이 클로즈업된다. 감독의 의도가 뭐였는지 궁금하다.
“그 구호는 북한 당국이 주민들에게 하는 가스라이팅이다. ‘광혁’이 ‘진철’에 의해 목이 졸리는데 그 뒤에 ‘인민을 위하여’라는 구호가 선명하게 보이도록 연출했다. 권력층에 의해 인민들이 실제로 목이 졸리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광일’이 ‘진철’의 머리를 내리친다. 광일은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이었는데 중간 아첨꾼들이 인민의 편에 섰을 때 권력이 무너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연출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데, 혹시 차기작도 생각하고 있나?
“‘두 병사’가 북한 내부 이야기를 다뤘다면 한국 사회에서의 탈북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미디어를 이용해서 북한의 인권 상황을 알리는 그런 콘텐츠를 계속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