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 인덱스] #12 유통과 기아의 상관관계

조중우의교(압록강철교)를 통해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중국 랴오닝성 단둥으로 향하고 있는 트럭. /사진=데일리NK

북한은 대외 원조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외 원조를 확보하여 국내 경제난을 타개하는 북한의 전략 중 하나는 대내 상황의 열악함을 과장하여 알리되, 내부 정보에 대해서는 철저히 은폐하여, ‘국가’만이 유일한 북한 경제 상황의 ‘입’이 되는 것이었다.

최근 BBC는 북한의 실상, 그중에서 평양에서 배를 굶주리는 주민의 존재를 포함한 영상을 방영하여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DailyNK의 협조를 받아 북한 주민의 ‘입’을 통해 전달된 북한의 실상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해당 영상은 정보의 출처가 북한 당국이 아닌, 북한 주민 ‘발(發)’이라는 점에서도 새로운 소통 창구의 존재와 가치를 보여준다.

영상에서 코로나 발생으로 인한 북중 무역의 중단은 북한의 식량난과 연동되어 내부 어려움을 가중시킨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코로나 위기 극복 이후에 완화될 것이라고 판단될 수도 있으나, 문제는 북중 무역이 막힌다는 것이 현재의 북한 경제 상황에 가지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로 국가 취약성에 관한 문제이다.

취약성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요소로 측정될 수 있으나, 북한의 이번 위기의 경우 단순히 국가 시스템이 무너져 국민들을 이끌지 못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할 가능성을 의미해도 충분할 것이다. 코로나 이전의 국경 인근 지역 상황을 살펴보면, 그 심각성이 더욱 와 닿을 것이다.

국가 취약성의 노출북중 무역의 중단 이후

양강도에서 2018년 탈북한 한 청년의 증언을 들어보았다. 그는 2016년에서 18년 사이 굶어 죽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매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젊은 청년들이나 신혼부부들이 매우 어려워 보였다고 회고하였다.

사회생활이나 경험이 풍부하지 않고 인맥이 부족해 먹고 살 방편이 마련되지 않은 젊은 청년들은 중국으로부터 수요가 있는 부업거리를 받아 파는 것만이 먹고살 길이었다고 한다. 주변 친구들이 했던 부업거리는 얇은 은박지를 종이에 붙이는 작업이었다. 몇백 장씩 해내야 만 하루에 쌀을 조금은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수입을 벌었다고 하니, 밤이고 낮이고 틈날 때마다 해내며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당시에도 먹을 알이 있는 외화벌이 회사에는 직계 가족이나, 아무거나 시켜도 말 잘 듣는 소위 순진하고 사람들만 뽑혀 힘을 쓰곤 했다. 일반 직장에서 제공하는 월 생활비는 북한 돈 3500원(당시 쌀 1kg 5200원 양강도 기준, DailyNK)에 그쳤지만, 당시 이들에게 한 달에 150위안(북한 돈 18만 6000원, 1위안=1240원, 2018년 12월 26일 평양 기준, DailyNK)이 주어졌다. 버는 만큼 축적을 하고 위기에 버틸 수 있는 여유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러한 기회는 한정적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밀수의 철인 가을철이면 헐값에 물건을 받아 중국에 팔거나, 중국으로부터 주요 원자재가 들어와 국내 수요를 맞춰주어야 한다. 청년은 양강도에서 물건을 받아 나가는 많은 택배차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장사꾼들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된 이후에는 차량이 지역과 지역 간에 열심히 물량을 나르는 유통 수단으로 기능했다. 이러한 상황인데 중국이 막히면 물건도 들어오지 않고, 운전하는 사람들 포함해서 장사꾼들이 무엇을 벌어 먹고사느냐 하는 문제만 남는 것이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농약과 비료도 원활한 수급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국경에 의존한 주민들의 생계 수단 상실, 농업생산량의 저하, 유통되는 물품의 가격 상승, 실질적인 주요 수입 원천의 공급 중단 등 많은 것이 국경과 얽혀있다.

평안북도의 농촌 풍경. 한 주민이 밭 한가운데 앉아 있다. /사진=데일리NK

위기를 견디는 각자만의 생존방식

코로나 이전 가정 내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 청년 증언자는 2018년 당시에도 영양을 골고루 갖춘 밥상을 북한에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 가족이 매번 먹는 밥상을 보며, 북한과 비교되어 옛날 기억이 많이 나곤 했다는 그는 입쌀 먹고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뿐더러 산에 가서 약초를 캐어 먹고 사는 화전민을 목격한 사연이나, 옥수수나 국수를 주식으로, 된장국을 곁들이는 것 정도가 주변 이웃들의 흔한 밥상이었음을 말한다.

한국으로 먼저 온 어머니가 보내 준 송금으로 버틸 수 있었던 자신 또한 두부나 콩나물 정도를 함께 먹는 것은 그나마 채소를 챙겨 먹는 것이고, 겨우내 김치로 버텼다고 한다. 영양이 부족한 식단으로 하루 세 끼를 먹어도 배가 고파 위가 쓰린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북한에 함께 살던 ‘큰엄마(이모)’는 궁리 끝에 방 한 칸을 떼어 임대를 내주기 시작했다. 노동력을 제공하기 힘든 60, 70대 여성들은 집 한쪽을 쪼개서 팔고 윗방에 가서 살았다. 1동에 2세대가 살던 가족이 1동 5세대로 늘어났다. 그야말로 모든 수단을 강구해 연명하는 수준이다.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들의 고뇌와 걱정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위기 징후를 감지할 수 있을 만한 지표도 부족하고, 모니터링을 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BBC의 이번 영상은 ‘현대판 기아’가 북한 사회 구조상 아주 쉽게 발생 가능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미흡한 위기 감지 역량과 단속의 강화

북한 당국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상식적인 ‘관(觀)’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북한 통계에 관한 신뢰도를 따져보면, 내부적으로도 과잉 충성 혹은 책임 면피를 위한 조작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지난 6월 26일 발간된 노동신문에서는 재해 문제의 발생이 곧 “이곳 일꾼(간부)들이 자연재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업을 실무적으로 대하며 공간과 허점을 제때에, 정확히 찾아 대책하지 못한 데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위기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뿐더러, 실태의 과소 집계 혹은 문제를 축소하게 만드는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 와중 국가도 통제 수준을 높였다. 직장 이탈자나 결근자, 다른 지역으로의 무단이동자를 대대적으로 단속시켰다. ‘비사회주의적 행위’에 대한 상무 검열도 강력해졌다. 오히려 이런 위기에는 군, 당이나 인민위원회, 보위부, 안전부에서 일하는 정치, 법, 행정일꾼들은 단속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높여 먹고 살 궁리를 더 하게 되는 것이 북한의 생리이다. 코로나는 ‘북한’이 주민들에게 너무나 취약한 것을 넘어 가혹한 국가임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 발간 이후 10주년을 맞이했다. 대량 아사의 위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적 발전과 구조의 변화에 따라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발생하고, 그것이 현재의 북한 주민들에겐 굶어 죽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북한 당국은 내부적으로 쌀 생산량에 대한 증가 대책을 마련한다고 알리며, 국가 경제로부터 독립하여 시장과 공생하던 주민들을 다시 국가에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북한 사회의 두 번째 위기 징후를 읽은 우리는 다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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