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또다시 잠행중이다. 지난달 18일 국가우주개발국 현지지도 이후 1개월여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같은 ‘그림자 행보’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그때마다 다양한 억측이 고개를 든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김정은 신변에 이상이 생겨 북한 사회나 남북 관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소망과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2020년 4월 세계 유수의 전문가와 언론들이 출처 불명의 ‘김정은 유고설’ 광풍에 휘말려 크게 낭패를 보았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김정은은 140kg 초고도비만에 성인병도 많지만 아직 39세에 불과한 젊은 지도자다. 쇠를 씹어도 소화해낼 나이다. 건강에 치명적인 이상이 발생하려면 최소한 10년은 지나 40대 후반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야누스의 얼굴을 한 승부사의 기획 연출극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고 싶은 대로 보다가는 ‘제2의 판단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김정은의 긴 침묵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추적해 나가야 하겠지만, <전략적 숨고르기>에 좀 더 무게를 두고 관찰해 나가는 게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역내 환경이 매우 불투명하고 그만큼 김정은의 속내도 복잡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4월 말 윤석열-바이든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한 『워싱턴 선언』은 김정은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주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의 당혹감
김정은은 2021년 1월 8차 당대회에서 국방 및 무기발전 5개년 계획을 채택한 이후 ①전략·전술핵 개발의 가속페달을 더욱 세게 밟으면서 ②이를 탑재할 수 있는 다종다기한 신형미사일을 100여 차례 넘게 시험하였으며 ③핵불포기와 선제 핵공격 정책을 법제화(2022.9)한 데 이어 ④핵전력을 일선 부대에 실전배치해 나가면서 ⑤김정은·김여정을 비롯한 언론매체들은 주요 계기시마다 대한민국과 미국을 향해 핵사용 위협을 노골화해 왔다.
이러한 김정은의 공격적 핵정책은 기본적으로는 ▲김씨 일가 영구집권 기반 구축 ▲사회주의 강국 건설 ▲전 한반도 공산화통일이라는 3대 대전략을 구현하기 위한 하드웨어(hardware) 구축 작업의 일환이지만, 보다 단기적·실제적으로는 9부 능선에 도달한 핵개발의 ‘최후 정상공격 프로세스’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핵보유국의 위상을 인정받고, 그 힘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비핵화 협상이 아닌 군축회담의 장(場)에 나서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김정은의 복안은 “한미 간 핵협의그룹(NCG) 창설, 미국의 핵탑재 전략핵잠수함 한반도 정례 전개”를 골자로 하는 『워싱턴 선언』과 만약 북한이 핵도발을 자행할 경우 “미국은 <핵에는 핵> 원칙 하에 즉각적, 압도적, 결정적 대응으로 북한 정권의 종말을 맞게 할 것이다”는 『바이든의 직설적 경고』로 인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지금 김정은이 처한 상황을 복싱에 비유하면, 그간 무모할 정도로 많은 훅과 잽을 날리며 호기스럽게 달려들던 김정은이 윤석열 대통령의 메가톤급 카운터 펀치(‘워싱턴 선언’)를 맞고 다운되었다가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한일 정상 간 셔틀외교라는 날카로운 후속 잽을 연이어 맞았고, 앞으로 G7(주요 7개국) 회의라는 묵직한 어퍼컷 세례도 피해야 한다. 김정은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일종의 ‘안보 딜레마’ 국면이다.
그래서 북한은 김여정이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원론 수준의 비난 반응을 보인 이후 규탄 집회 또는 언론 비난 수위를 극도로 조절하며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군사도발도 지난달 13일 화성-18형(ICBM) 시험발사를 마지막으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다시 말해 지금은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가기 전 ‘숨고르기, 대응책 모색의 시간’이라고 할수 있다.
김정은, 조만간 ‘강대강’ 행보 재개
김정은 머릿속에는 지금 무엇이 있을까? 많은 게 있겠지만, 대표적으로는 자신이 직접 예고한 정찰위성 발사, 김여정이 공언한 ICBM 정각 발사, 한미 정보당국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7차 핵실험 등 핵전력 강화책을 언제, 어떤 식으로 추진하여 핵보유국 위상을 강화해 나갈까?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는 언제, 어떤 조건으로 미국과 대화를 재개하여 제재를 해제하고 경제를 활성화시켜 나갈까?로 압축될 수 있다.
이 같은 당면 목적을 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김정은이 고려하고 있을 핵심 요소는 ▲정권 안정, 자력갱생에 기초한 사회주의 계획경제 지속, 중·러와의 연대 강화 및 지원 확보가 당연히 제1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당면해서는 6월 초까지가 모내기철 농촌 총동원 기간이라는 점, 북핵 문제와 세계질서 재편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G7회의(5.19~21, 일본)가 열리는 점, 누리호 3차 발사(5.24)와 한미합동군사훈련(5.25~ 6.15)이 계획되어 있는 점, 김정은이 연초에 의의를 강조한 이른바 전승 70주년(북한은 연례적으로 6.25부터 7.27까지를 반미투쟁월간으로 정하고 대적 의식 집중 고취)이 다가오고 있는 점 등이 있다.
▲좀 더 장기적으로는 2024년부터 미국의 대선 캠페인이 시작되고, 4월에는 대한민국의 총선이 예정되어 있고, 2025년에는 북한이 9차 당대회를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김정은의 3대 대전략과 핵능력 고도화를 위한 세부 전략전술 및 실행계획, 김정은과 김여정의 발언, 환경적 요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김정은은 ①당분간 비핵화 협상으로의 정책 전환을 모색하기보다는 ②북중러 대 한미일 신냉전 구도 구축을 통해 보다 강화된 체제안전판을 마련하는 가운데 ③기존 정면돌파전 전술을 견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즉 최소한 올해까지는 ‘강대강’ 전술을 통해 핵전력 고도화와 남남갈등 조장에 주력하면서 2024년을 정책 전환의 변곡점(이른바 ‘Again 2018’)으로 고려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한편 김정은이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선언하여 사실상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있는 ‘정찰위성’ 발사는 우리의 누리호 3차 발사(5.24)와 연계하여 실행함으로써 우주의 평화적 이용, 이중기준 적용 부당성을 선전하는 소재로 활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G7회의가 열리고, 누리호 3차 발사가 있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되는 5월 하순은 김정은의 긴 잠행이 끝나고, 한반도는 다시 한번 큰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대응
대화와 협상에 기초한 북한 비핵화,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은 사실상 물건너갔다. 문재인 정부의 참혹한 대북정책 실패와 김정은의 광적인 도발 행보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상과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 따라서 지금은 ‘힘에 의한 평화, 핵균형을 기초로 한 북핵 무력화’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출범 1주년을 맞은 윤석열 정부가 지난 시기 비뚤어진 대북정책을 다시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것은 큰 의의를 가진다. 그렇지만 자만해서는 안 된다. 대국민 자신감 고취(전쟁 불안감 불식), 3축체계 구축 가속화, 『워싱턴 선언』 내실화, 중국의 대북제재 참여 압박 등에 계속 총력을 기울여 나감으로써 김정은으로 하여금 기존 셈법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끔 해야 한다.
한편 이 같은 수비를 중심으로 한 대북정책과 함께 북한 체제를 위·아래로부터 정상화시켜 나가는 ‘공세적·지속적 활동’(필자는 5화 전략으로 명명: 비핵화, 자유화, 시장화, 친한화, 세계화)도 정부, 민간, 국제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제안한 ‘담대한 구상’의 실현 노력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북한의 위기 회피, 시간 벌기, 한미일-여야 이간을 위한 가짜평화 공세에 역용(逆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은 김정은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와 협력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이 마음 내키는 대로 차단해온 대북 직선로만 고집하지 말고, 더 커진 국격에 맞게 너 넓은 세계로·미래로 나아가는 우회로를 더욱더 튼튼하게 만들어 나가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좀 더디고 어렵지만 <북핵문제 해결,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 자유 통일한국 건설의 바른 길> 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글을 맺는다.
유비무환-국론통합-주동작위(主動作爲)-적수천석(滴水穿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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