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토교화소서 탈주했다 붙잡힌 20대 남성, ‘반역자’로 낙인 찍힌 사연

[북한 비화] 교화소 내 가혹한 고문 끝에 사망했으나, 교화소 측은 자살 위장해 처리

2020년 1월 신의주 교화소에서 탈주했다가 붙잡힌 20대 김모 씨가 갖은 고문으로 사망했으나, 교화소 측은 그가 교화소 내에서 자살한 것으로 처리해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데일리NK

북한에서 자살 행위는 엄격히 금지돼 있다. 재판을 받고 형 집행 중인 교화인(교도소 수감자)의 자살 행위는 더더욱 문제시된다.

북한은 일반 주민이 자살하는 경우 해당 주민을 국가 반역자로 여기며, 교화인이 자살하는 경우에는 자신이 나라 앞에 지은 죄를 다 못 씻고 스스로 쉬운 길을 택했다는 프레임을 씌워 가문의 호적 문건에 평생 따라다니게 반역자 딱지를 박아 넣는다. 대대로 정치적 탄압을 받으며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셈이다.

이렇듯 국가가 반역 행위로 간주하는 자살을 국가 안전기관이 자신들의 참혹한 인권유린과 고문 등 악행을 감추기 위해 악의적으로 조작한 사례도 있었다.

2020년 1월 신의주 백토 교화소에서 탈주한 후 고향인 의주군 수진리로 향하던 남성 교화인 김모(20대) 씨는 교화소 탈주 3일 후 외딴 골짜기에 숨어있다가 평안북도 안전국과 교화소 수색, 타격대의 총에 맞아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어려서부터 또래들보다 유난히 키가 작아 군에 입대하지 못하고 밀수에 뛰어들었던 의주 태생 김 씨는 열아홉이 되던 해에 불법 밀수행위로 3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외부 건설 작업에 동원된 기회에 탈주했다.

정신을 잃은 그가 눈을 뜬 곳은 신의주 교화소의 차디찬 철창 속 감방이었고, 관통상으로 심한 출혈이 발생한 그의 오른쪽 다리는 아무런 치료나 응급처치도 없이 방치돼있었다.

앞서 김 씨는 교화소 동료의 면회 온 가족을 통해서 할아버지가 자신의 교화소행 소식을 듣고 쓰러졌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에 담당 안전원에게 자신의 집안 상황을 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죄수는 입 다물고 징벌과제 수행에 매진해라’, ‘네가 죄지은 것에는 가족의 잘못도 있으니 죽어도 싸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 씨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할아버지가 눈을 감기 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뵙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탈주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밀수를 해왔기에 지형에 밝았던 그는 외부 건설 작업에 동원된 틈을 타 현장을 이탈했다가 결국 며칠 만에 잡혀 오게 된 것이었다.

김 씨의 탈주에 악에 받친 담당 안전원들은 총상 입은 그의 다리를 발로 짓밟는 등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그렇게 교화소 측은 123호 도로를 통과해 의주 수진리로 비법월경(탈북)을 시도하려 했다는 거짓 자백까지 강제로 받아냈다.

심지어 교화소 소장은 ‘그가 안 죽으면 죽게 만들라’고 지시했고, 아래 안전원들은 밤마다 총상으로 고열에 시달리던 김 씨를 발가벗긴 채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을 가했다. 결국 김 씨는 고역을 치르다 붙잡혀 들어온 지 11일째 되던 날 감방에서 동사했다.

그 즉시 신의주 교화소는 갖은 고문 끝에 동사한 20대 김 씨 사건을 탈주 후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교화소 예심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처리했다.

교화소 측은 김 씨에 관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관리인들과 수감자들을 입막음했지만,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던 교화소 관리인 가족들과 형기를 마치고 나간 주민들은 교화소의 만행을 함구하지 않았다. 이에 이 사건은 ‘기막힌 사연’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그러나 김 씨의 죽음의 진실은 여전히 묻혀 있다. 그의 호적에는 ‘재생의 길을 열어준 공화국과 원수님의 배려에 배은망덕하게 죄를 씻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반역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다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주민들은 ‘고문으로 죽음에 내몬 것이나 같은 데 자살로 처리해 반역자로 낙인찍은 것이다’, ‘억압하는 자나 모르는 척 입 닦고 짝짜꿍하는 자나 다 한 짝이니 자살이라면 자살이요 반역자라면 반역자가 되는 게 아니겠냐’며 교화소의 처사를 맹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