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당 창건 75주년을 기념해 ‘위대한 향도’라는 주제로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이달 11일, 김정은이 관람한 가운데 대집단체조 및 예술공연을 펼쳤다. 당시 김정은의 굳은 얼굴이 포착되었었는데, 이후 이달 말까지 진행하기로 했던 대집단체조는 중단되고 말았다. 김정은의 심기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분석들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런데, 예술공연이 있은 다음 날 노동신문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당의 령도따라 사회주의위업의 승리를 위한 새로운 발전과 번영의 진군길을 힘있게 다그쳐나가려는 우리 인민을 고무해주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달 28일에는 ‘과감한 공격전은 진취적인 일본새(일하는 태도)를 요구한다’는 제목의 논설을 실었는데, “당창건 75돐(돌)을 맞으며 성대하게 진행된 경축행사들은 새롭고 독특한 형식과 양상, 황홀하면서도 장엄한 화폭, 열정적이며 감동적인 내용으로 일관된 대걸작, 성공작으로 조국청사에 빛나는 페지(페이지)를 아로새겼고 세계를 경탄시켰다” “기성의 틀, 기존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10월의 특색있는 경축행사들에는 우리 당의 비범한 안목과 위대한 창조의 세계가 비껴있다”고 호평했다.
그러나, 16일자 ‘당 창건 75돐을 전인민적인 경사로 성대히 경축한 데 대한 조선중앙통신사 상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에 대해서는 단 한 줄로 이렇게 소개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를 모시고 조선로동당창건 75돐경축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위대한 향도》가 릉라도의 5월1일경기장에서 진행되였다.” 당의 공식입장 성격의 보도라는 점에서 이 평가에 더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작년에도 평양에서 6월 3일부터 개막한 집단체조, <인민의 나라>가 김정은의 관람 이후 10일부터 중단되었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그릇된 창작, 창조, 기풍, 무책임한 일본새’에 대해 심각히 비판했다고 4일에 보도했었다. 이런 점을 미루어볼 때, 이번 <위대한 향도> 대집단체조도 김정은에게 동일한 비판과 평가를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번 <위대한 향도>의 공연순서는 서장에 <<영원한 백두의 행군길>>과 <<당은 우리의 향도자>>, <<사회주의 오직 한길로>>, <<격동의 시대>>, <<민족의 영광>>의 장들, 그리고 종장은 <<우리에겐 위대한 당이 있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 구성은 지난해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인민의 나라>와 2018년(9.9)에 개최되었던 <빛나는 조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당시, 노동신문은 2019년의 공연(인민의 나라)에 대해서 “위대한 당의 령도밑에 자주적 존엄과 긍지를 떨쳐온 우리 인민의 빛나는 승리의 역사, 인민의 꿈과 리상을 실현해나가는 사회주의조국의 참모습을 대서사시적화폭으로 펼쳐보인다”고 앞서 보도했었다(5월 26일자).
2018년에 개최된 <빛나는 조국> 공연의 구성은 서장 <<해솟는 백두산>>과 <<사회주의 우리 집>>, <<승리의 길>>, <<태동하는 시대>>, <<통일삼천리>>, <<국제친선장>> 등의 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대해 노동신문은 “우리 공화국의 건국과 수호, 기적과 번영의 발전행로에 빛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영원불멸할 혁명업적과 당의 령도따라 세기적인 변혁을 이룩하며 백승의 한길로 승승장구해온 주체조선의 영광찬란한 력사를 대서시적화폭으로 감명깊게 보여주었다”고 평가했었다(2018.9.10.).
2018년 공연에서는 김일성-김정일을 강력히 내세웠다면 2019년에는 당의 영도에 더 초점을 맞췄었다. 올해도 예술공연의 주제들을 볼 때, 더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즉, 김정은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내심 예술공연이 자신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기를 기대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북한 문학 부문에서는 김정은의 위대성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1967년에 조직되어 ‘수령형상문학’을 전문으로 창작해온 4·15문학창작단에서는 지난달, 김정은의 혁명업적과 위대성을 형상한 ‘불멸의 여정’의 첫 장편소설 ‘부흥’(백남룡 작)을 내놓았다. 이것을 시작으로 김정은의 위대성 창작물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위대성을 담은 ‘불멸의 역사’와 김정일은 ‘불멸의 향도’에 이어 김정은의 ‘불멸의 여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 북한에서 김정은의 혁명역사, 혁명 활동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된다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김정은의 위대성을 묘사한 소설 ‘부흥’에서는 김정은의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사업 강화에 초점을 맞춰 정규학교 의무교육 12년제 전환, 대학교수들을 위한 미래과학자거리조성, 평양애육원 건설 등의 업적을 꼼꼼히 나열했다고 10월 23일자 노동신문은 전했다. 그러면서, 이 소설이 “국가 부흥의 무진 막강한 힘은 인재자원에 있으며 온 사회에 교육중시 기풍을 확립하고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교육을 끊임없이 발전시켜나갈 때 당당히 세계를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사상을 밝힌 시대정신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은은 집권 첫해인 2012년에 기존의 11년제 의무교육제를 12년제로 개편하고 초급중학교(중학교)와 고급중학교(고등학교)를 분리하는 등의 북한교육시스템의 변화를 꾀했다. 이것은 세계적 추세에 맞춰 교육제도를 바꿨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동시에 김정은은 과학기술을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왔다.
반면, 이달에 공연된 <위대한 향도>는 김정은의 이와 같은 업적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작년에 공연된 <인민의 나라>를 ‘그릇된 창작 기풍’이라고 비판한 것과 같이 이번 공연도 김정은으로부터 동일한 혹평을 받았을 수 있다. 이것은 이번 공연에 ‘새로운 기풍’ ‘새 세기의 요구에 맞는 시대정신’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이 김정은 위대성 창작물에는 담겼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이번 예술공연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김정은의 위대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유훈통치적 성격으로 기존의 공연들과 같은 방식으로 꾸몄던 것으로 보인다.
과연, 현재 북한에서 유훈통치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달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의 김정은의 연설만 봐도 그렇다. 약 27분 넘게 진행된 연설에서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은 단 두 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도 두 선대지도자들을 칭송하기 위해 거명된 것이 아니라 김정은이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을 설명할 때와 인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대목에서 단지 거론되었을 뿐이다. 연설 서두에서 선대 지도자들부터 칭송하는 것이 과거 김정은식 연설의 패턴이었다. 또한 인민들의 정신적 무장과 혁명으로 고무시킬 때 선대지도자들의 유훈을 내세우는 것이 기존의 방식이었다. 2015년 당 창건 70주년 열병식 연설이 딱 그랬었다.
그 당시 연설에서 김정은은 김일성, 김정일을 11차례나 거명했다. 연설 서두부터 김일성을 당의 창건자로,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칭하면서 두 선대지도자에게 인민들과 함께 가장 숭고한 경의와 영원무궁한 영광을 드린다고 시작하였다. 계속해서 연설 도중에 ‘위대한 수령님들의 유훈을 받들어’, ‘위대한 지도자들의 영도 밑에’, ‘수령님들의 비범한 영도아래’, ‘위대한 수령님들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위대한 지도자들이 가르쳐주신 대로’ 등 문구를 바꿔가면서 거듭거듭 김일성-김정일을 칭송하였다. 이 연설에서 우리는 유훈통치 시스템이 강력하게 작동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 창건 75주년 연설에서 김정은은 단 한 차례도 김일성, 김정일을 칭송하지 않았고 두 지도자들의 유훈이니, 영도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현재 북한의 지도이념인 ‘김일성-김정일주의’도 단 한번도 읊조리지 않았다. 김정은의 의도성이 다분히 엿보인다. 유훈통치의 실종이라고 충분히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그런데, 이달에 개최되었던 대집단체조 및 예술공연은 여전히 유훈통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지사다. 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다음날인 11일에 김정은이 열병식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이때 <김정은 결사옹위>의 구호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김정은은 북한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북한에게 새 세기에 요구되는 시대적 정신은 곧, 김정은의 <불멸의 여정> 시기라는 것을 김정은은 강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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