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잊혀진 영부인 Ⅰ: ‘존경하는 위원장’ 김성애

북한에서 개인숭배 대상은 김 씨 일가의 구성원인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이다. 그러나 원래 이 목록에서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김일성의 세번째 배우자인 김성애다.

김성애의 어린 시절 정보는 많지 않다. 핵심적인 출처는 강수봉의 ‘붉게 물든 대동강: 前 인민군 사단 정치위원의 수기’라는 회고록이다. 여기서 북한군 고위 군관이었던 강수봉은 1959년 숙청 당했고, 1969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강수봉의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북한 내각 사무국 참사의 딸인 김성애는 6.25 때 김일성의 시종비서가 되었다. 김일성과 김성애 비서는 많이 가까워졌는데, 1951년경 김성애는 박정애 당 중앙위원에게 본인이 임신했다고 알려주었다. 수많은 증언에 따르면, 박정애는 당시에 김일성의 ‘하렘’의 책임자였다. 결국에는 수상과 비서는 마지못해 결혼했다.

몇 년 동안 김일성과 김성애의 관계는 비밀이었지만, 1958년 김일성이 그녀를 고급간부에게 자기 부인으로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1965년 9월 14일 드디어 노동신문을 통해 ‘내각수상 부인 김성애 녀사’라고 공식화되었다.

김성애의 정치활동에 ‘김정일’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일성의 두 번째 배우자인 김정숙의 아들인 김정일은 새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소련 외교관들은 1950년 김성애가 김정일을 꾸짖었고, 이에 김정일은 새어머니를 자동차에서 발로 걷어차려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김성애는 자기 아들인 김평일을 내세우도록 노력하였다고 전해진다. 북한 간부들 중에 ‘김평일파’도 있었고 ‘김정일파’도 있었다. 남일과 최용건이 김평일을 지지했고, 오진우가 김정일을 지지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1970년 김성애는 북한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이 된 후 어느 정도 개인 숭배를 받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서 ‘김성애 녀사를 따라 배우자’라는 운동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노동신문 기사 제목 김성애 언급 횟수. /필자 분석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북한 매체는 김성애를 호칭할 때 ‘-께서’ ‘-시-’ 등을 사용하였다. 북한에서 이 용어는 옛날 궁중어만큼 의례적이기 때문에 김성애가 북한의 2인자격이 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또한 김성애는 ‘존경하는 위원장’이라는 첫번째 호칭을 받았고 여성 동맹 기관지 ‘조선녀성’에 김성애를 찬양하는 칼럼들도 게재되었다.

물론 김일성과 비교하면 김성애에 대한 숭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북한 도서에 김일성 초상화만 나왔고, 김일성의 이름만 굵은 자로 표기했다. 특히, ‘조선 녀성운동의 위대한 령도자’도 김성애가 아닌 김일성이었다.

김정일이 승진하면서 김성애의 권위가 사라지기를 시작하였다. 1974년 2월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추대된 후 북한 매체는 김성애에 대한 높임 말을 중단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김정일-김성애 싸움을 북한 영화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1973년 북한에 ‘우리 집 문제’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주인공 안해(아내)는 가족의 행복을 파괴하는 ‘악당’으로 그려진다.

당시 북한 영화를 관리한 간부는 바로 김정일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아버지 김일성에게 ‘새어머니는 아버지를 통제하면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

1974년 김성애의 형제였던 해군사령부 정치위원 김성갑과 황해남도 책임비서 김성호는 강등되었다.

다만, 김일성은 김성애와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이 사망했을 때까지 그는 북한 엘리트에서 남았다. 1980년의 제6차 당 대회에 그녀는 중앙위 위원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1982년에 김일성 훈장까지 받았다. 여기서 또 흥미로운 점은 ‘우리 집 문제’ 속편 ‘우리 옆집 문제’는 나왔는데, ‘우리 집 문제’에 악당이었던 여성이 ‘우리 옆집 문제’에서 완전히 개선된 훌륭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후 1986년부터 북한 매체에서 김성애 언급은 거의 사라졌다. 1994년에 지미 카터 미합중국 전 대통령이 북한에 방문했을 때 얼굴이 잠시 나왔을 뿐이었다.

김일성, 김성애 그리고 지미 카터 대통령 /사진=The Carter Center

김일성 사망 후 김성애의 정치적인 생활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마지막 등장은 김일성 장의위원회 목록에서였다. 그러나 김일성의 배우자였는데도 제114호 위원에 불과하였다. 김성애는 북한 역사 책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공식 김일성 평전에 따르면 김일성과 결혼한 적도 없는 인물이 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김성애는 북한 지방에 있는 빌라에서 살았고, 2014년경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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