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위조된 김일성 비서실장 고봉기 회고록

‘김일성의 비서실장 : 고봉기의 유서’책 표지. /사진=이휘성 국민대학교 책임연구원 제공

한국 사회에서 북한 관련 도서들 중 회고록만큼 인기 있는 책은 많지 않다. 성혜랑의 ‘등나무 집’, 황장엽의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강철환의 ‘수용소의 노래’가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1980년대 후반기 ~ 1990년대 초반 이런 류의 상당히 많은 도서가 출판되었다.

당시 려정(강수봉)의 ‘붉게 물든 대동강’, 이상조와 유성철의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등이 등장하였다. 바로 그때 소련과 중국은 개방되었고 냉전의 종결로 한국 사회는 북한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김일성의 비서실장 : 고봉기의 유서’라는 도서도 있다. 제목만 보면 대단히 흥미롭고 대단한 사료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은 사실 날조에 불과하다는 증거를 얻었고, 이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1989년 천마 출판사에서 나왔다. 제목을 보면 함경북도 당위원장 등 중요한 직위에 있었던 고봉기의 회고록처럼 보인다. 책에는 참으로 신기한 내용이 나온다. 김일성과 최용건 사이에 갈등, 8월 종파 사건에 윤공흠이 김일성을 비판 연설, 1960년대 북한 경제 발전 노선에 관한 논쟁 등이다. 이 책은 실체였다면 가치가 매우 높은 사료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전 필자는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이 책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을 보았다. 이 주장에 따르면 ‘고봉기의 유서’의 실제 저자는 김학철(金学铁)이라는 중국 조선족이었다. 그가 위조 회고록을 작성하였다는 것이다. 이 링크를 클릭하면 이 주장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주장이 사실일지 궁금해서 북한 역사를 전공하는 여러 동료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속 시원한 답변을 들을 순 없었다. 이에 필자는 실체를 탐독하고자 마음 먹었다.

한편, 책에서 사실처럼 보이는 내용은 있었다. 예컨대, ‘고봉기의 유서’의 제106p에서 1956년 8월 종파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볼 순간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고 느꼈다. 1994년, 즉 ‘고봉기의 유서’가 출판된 지 5년이 지나 신동아에서 홍순관이라는 김일성의 비서실장의 증언이 나왔고 내용은 ‘고봉기의 유서’와 매우 닮았다.

마찬가지로, 책에는 노골적인 조작으로 보이는 내용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필자는 소련 사료에서 ‘고봉기 유서 조작설’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았다. 일단 ‘고봉기의 유서’의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다:

1959년 하반년에 나는 감방에서 나와 얼마 아니하여 소비조합 중앙부위원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나는 김일성 살인 망나니 패거리의 죄행 문자로 적어둘 필요를 느꼈다. 때가 오면 이것은 전 민족 앞에 공개하는 고소장으로 되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련 대사관의 참사 펠리셴코의 일기에서 이를 반박하는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아래 문서를 보면 고봉기는 전혀 석방되지 않았던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1959년 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성은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최창익 등 종파잔당 집단 사건 수사 과정을 끝났다. 이 사건에 관하여 150여 명이 체포되었다.

1960년 1월 말 최창익의 반당 일당 35명의 형사사건 등을 조사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소는 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장 김익선(재판소 소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겸 평양시 당위원회 위원장 리효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서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부장 김경석 등 있었다.

방학세는 최창익, 박창옥과 다름 피고인들이 수사 과정에 한 증언을 확인하였다고 했고 자신이 유죄인 사실, 자신의 종파 행위의 목적이 현 당과 정부의 지도부를 제거인 것을 확인하였다고 했고 이 목적을 이루기를 위하여 폭력까지 쓸 것이라고 확인하였다고 했다.

재판소는 20명에 대한 총살 판결을 내렸고, 15명을 금고에 처했다. 총살 판결을 받았던 사람들은 최창익, 박창옥, 김웅, 김원술, 양계, 고봉기 등이었다. 판결은 집행되었다. 고려인이었던 전 부수상 박의완은 금고 10년 판결을 받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상 방학세와 한 대화에서. 1960년 2월 12일

즉, 고봉기의 운명은 다른 반김일성파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1959년 말 또는 1960년의 초 사형당했다. 이에 ‘고봉기의 유서’는 실제 증언으로 볼 수 없다고 필자는 판단하게 되었다. 이 책의 진짜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북한 내부 상황 또한 중국에 망명한 북한 간부들을 매우 잘 알았던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고봉기의 유서’라는 고급(?) 위조가 탄생될 수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추측하건대 저자는 소련 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까지는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