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駐평양 체코슬로바키아 서기관과 ‘프라하의 봄’

북한과 체코의 수교 70주년에 즈음한 사진전시회가 지난 2018년 10월 천리마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사진=조선중앙통신 캡처

냉전사의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는 1968년 발발한 ‘프라하의 봄’이다. 당시 공산권 나라 중의 하나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개혁파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곧바로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연합군은 이 나라를 공격, 무력으로 국가를 장악했다. 결국 개혁 정부를 강제 해산하였고, 소련에 충실한 강경파 정권을 설립하였다.

여기까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 칼럼에서 필자는 ‘프라하의 봄’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주(駐) 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의 1등서기관 홀제네프스키(Horženevský)다. 그는 대사관의 2인자였는데, 대사 미로슬라브 홀룹(Miroslav Holub)이 외국으로 출장을 떠났을 때 임시 대리대사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홀제네프스키는 친소련(親蘇聯) 공산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 갑자기 시작된 개혁에 결사 반대하였다.

1960년대 평양에 대사관을 설치한 공산권 나라들의 대사관들을 보면,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의 역할은 조금 특별하였다. 이 나라는 폴란드, 스웨덴 그리고 스위스와 함께 중립국 감독위원회 위원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들은 판문점을 자주 방문하였고, 평양에 돌아와서 다른 나라의 대표자들에게 한미연합군, 그리고 ‘남조선(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1968년은 평양의 대사관들에게 바쁜 한 해였다. 그 전해인 1967년 김일성은 ‘유일사상체계’를 선포하였고 외교관들은 김일성 개인 숭배, 주민 통제 강화에 대한 보고서를 본국으로 열심히 보냈다. 또한 1968년 1‧21 사태 직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이 벌어져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외교관들은 평소보다 더 자주 판문점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에 벌어지고 있었던 일들은 고향에서 벌어지는 일들보다 훨씬 중요하였다. 그러나 3월 말 모든 것이 달라지었다. 강경파 지도자 안토닌 노보트니가 대통령직을 사직했고,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개혁파는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자유화 길로 나가게 되었다.

둡체크 정권은 중요 직위에 개혁을 지지하는 간부들을 임명하였고, 대중매체 검열제도를 폐지하였으며, 다당제 도입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 나라의 본질적인 변화는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일으켰다. 박정희 정권은 혹시 프라하에 무역 대표부를 설치하고 나중에 한국-체코슬로바키아 수교까지 가능하지 않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래서 판문점에서 남한 대표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외교관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칼럼의 주인공인 홀제네프스키 서기관은 남한 대표자들이 ‘뜨거운 사워크림 옆에 걸어다니는 고양이’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그는 남한 측의 태도에 대해 불안을 느꼈다. 홀제네프스키는 충실한 공산주의자였다. 그에게 있어 공산주의의 ‘철천지 원수(怨讐)’인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우호 표현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그는 본국의 정치 노선 전환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둡체크의 개혁 노선은 강화되었고, 이에 홀제네프스키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들과 자주 만나기 시작하였다. 그 친구들은 주 북한 소련 대사관의 일꾼들이었다.

1968년 7월 9일 홀제네프스키는 소련대사관을 방문하여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표현하였다.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최근에 시(市) 당위원회에서 해임당했다. 홀제네프스키는 자신이 가까운 미래에 비슷한 운명을 맞지 않을까 걱정했다. 얼마 전 체코슬로바키아의 외무상으로 사회민주주의자인 이리 하예크(Jiří Hájek)가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예크는 공산당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외교관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홀제네프스키는 프라하에서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지 않을까도 우려했다. 그는 소련대사관의 친구들에게 ‘매체 검열 폐지는 최악 실수였다’고 강조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반공주의자들이 더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또한 ‘사회도 정치도 무정부 상태에 들어서게 됐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홀제네프스키는 특히 다가오는 인민회의(Národní shromáždění) 선거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원래 북한 최고인민회의처럼 체코슬로바키아의 입법회인 인민회의는 공산당이 내린 결정을 형식적으로 수락하는 거수기 기구일 뿐이었다.

“진짜 선거를 하면 어떻게 될까.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충성하는 사회학자들조차, 선거를 실시할 경우 공산당 지지율이 30%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선거 후에 야권이 이긴다면 사회안전처, 국가안전처 등 공안 기관을 장악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최후를 맞이하고, 서양식 민주주의 질서가 생기지 않을까?”

홀제네프스키에게 이런 미래는 생각하는 것조차 아주 큰 고통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1등서기관은 더욱 걱정이 많아졌다. 7월 23일 다시 소련대사관을 찾은 그는 고향에서 ‘반동주의자들’이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했다고 말하였다. 홀제네프스키는 어느 경우든 자신이 소련에 무조건 충실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주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 직원들 중 둡체크 정권의 개혁 노선을 지지한 자가 적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우리의 주인공은 그들과 소통하는 걸 매우 불편해 했다.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서기관은 소련 대사관을 다시 방문하였다. 이번에 홀제네프스키는 자신이 더욱 자주 소련대사관을 방문하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서기관은 자기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소련대사관에 있는 것을 더 편안하게 느낀 것 같다.

홀제네프스키는 중국과 알바니아의 외교관들이 그에게 접근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소련과 분열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본 중국, 알바니아 외교관들은 이제 이 나라와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하였다. 홀제네프스키는 그들을 보는 것도 싫어했고 소련을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홀제네프스키의 고통이 끝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로부터 한 달도 지나가지 않아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바르샤바조약 기구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둡체크의 정권은 강제 해산되었고, 친소련 간부인 구스타우 후사크는 공산당의 제1비서로 추대되었다.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200여 명이 사살당했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수만 명이 서유럽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은 정말 홀제네프스키가 원했던 것이었을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소련 대사관 직원과 우리 주인공의 마지막 만남의 기록을 보면 그렇다고 판단할 수 있다. 10월 2일 홀제네프스키는 소련대사관을 다시 방문하였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 직원들이 자신을 ‘적과의 협력자’라고 비난하였다고 고백하면서 ‘그들은 지금도 새들이 쪼는 것처럼 행동해도 좋은 시대(역주 : 즉 불평을 얘기해도 되는 시대를 의미한다)라고 생각한다’라고 비난했다.

아무튼, ‘프라하의 봄’은 이제 끝나 버렸다. 홀제네프스키와 같은 인물들은 승리하였다. 주인공은 얼마 후에 소련에 복종하게 된 체코슬로바키아에 귀국하였다.

하지만 홀제네프스키의 공산주의 노선에 대한 충성은, 그의 출세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 백과사전에서는 정식 대사로 오르지 못한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서기관은 그 이후로 북한에 방문한 적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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