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 칼럼] 북한 경제 톺아보기 : 외자투자유치 정책 변화 (Ⅱ)

1988년 일본 조총련등과 합작해서 설립한 북한의 평양피아노합영회사. / 사진=조선의무역 홈페이지 캡처

이전 글 보기 : 북한 경제 톺아보기 : 외자투자유치 정책 변화 (Ⅰ)

6) 제일교포기업에 대한 투자유치 추진

1984년 합영법제정 후 목표로 하였던 서방기업, 특히 프랑스 및 일본기업의 투자유치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재일동포기업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투자유치를 추진하였다. 1986년 2월 28일, 평양을 방문한 재일 조선인상공연합회 결성 40주년 기념단에게 김일성은 합영사업 참여를 강도 높게 요구했다. 이것이 조조합영(朝朝合營)사업의 강령이 된 2·28방침이었다. 1984년의 합영법 발표 이래 1992년 7월까지 북한이 외국 기업과 투자유치계약을 체결한 것은 140건으로 이 가운데 116건, 1억 5천만 달러는 조총련 동포가 투자한 사업이고 1992년 당시 조업 중인 66건 가운데 85%인 56건이 조총련계 기업이었다.(북한의 경제발전전략 70년의 회고와 향후 전망, 양문수, 2015, 통일정책연구 24권 2호, 43p)

합영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재일교포사업가는 사쿠라그룹을 이끌고 있던 전연식, 전진식 형제였다. 사쿠라그룹은 전역식, 전진식 형제가 1951년 도쿄도 후추시(府中市)에서 창업한 기업으로 대형슈퍼마켓, 식품제조업, 볼링, 경마, 태권도장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으며, 1979년 불고기맛 양념이 유명해지면서 전국적인 기업이 되었다고 한다. 1996년에는 직원 2200명, 년매출이 1200억 엔에 이르렀으나 2018년에는 직원 370명이며, 연간 매출도 184억 엔 정도로 줄어들었다.

사쿠라그룹은 1987년 조조합영 제1호로 북한의 조선은하무역총회사와 합작으로 모란봉합영회사를 만들었으며, 남포에 양복공장과 피아노 공장을 운영하였다. 전진식이 만든 봉제공장은 노동자수가 1,000명에 이르렀으며, 1989년에는 신사복 5만 벌을 생산하였고, 1990년에는 10만 벌로 생산량을 늘렸다고 한다. 그러나 경직된 자세에 의하여 경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1990년대 중반 철수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북한에 투자를 하였던 재미교포 이찬구 회장은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전진식 회장이 북한에 바른 소리를 하자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아들인 전수열 회장이 피아노공장에 일본 기술자를 상주하도록 허용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여 결국 피아노공장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한다.(월간조선 2004.7)

와다 하루끼는 북한현대사(창비, 2014)에서 재일교포 합영기업 실패의 원인으로 북한의 대안의 사업체계를 꼽고 있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1961년 12월 김일성이 대안전기공장(남포시 대안구역)을 방문하여 지시한 공업 부문 관리방법이다. 김일성 현지지도 이전에는 공장지배인이 공장의 운영과 관리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 그리고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는 지배인 유일관리제였다.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통해 지배인 유일관리제는 관료주의적, 기관본위주의적, 이기주의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고 지적하며, 공장관리운영에 관한 최종 권한과 책임을 공장 당위원회로 넘기도록 하였다. 이후 북한전역의 공장과 기업소에 대안의 사업체계가 도입되었다.(통일부 북한정보포털) 대안의 사업체계는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전문성이 없는 당조직이 경영을 장악하여 기업경영의 자율성 위축시키고 운영을 파행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재일교포가 투자한 합영기업의 운영에도 대안의 사업체계가 적용되었으며, 합영기업의 생산계획이 국가계획에 종속되면서 정상적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합영기업이 성공하지 못한 또 다른 주요 요인은 북한이 1986년 이후 합영에 대하여 방어적이고 소극적으로 태도가 변화된 것이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1985 ~1986년의 구소련·중국에서의 개혁정책의 전개 양상의 영향을 받았다.

소련에서는 1986년 2월 고르바쵸프가 공산당서기장으로 취임한 후 최초의 당 대회에서 ‘근본적 개혁’의 실시를 호소하였다. 나아가 그는 같은 해 7월의 연설에서 개혁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상, 당의 본연의 자세까지 대상으로 하는 것임을 밝혔다. 중국에서는 1986년 3월에 개최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제6기 제4회 회의에서 정치체제개혁문제가 의제가 된 것을 계기로 이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졌고 더욱이 지도부의 예상과 의도를 넘어설 정도로 확대되었다. 북한지도부는 구소련·중국에서의 경제개혁의 실시가, 정치개혁실시와 민주화에의 요구로 파급·연동하여 가는 양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북한지도부로서는 경제개혁 논의에 제동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지도부의 심경의 변화는 1986년 7월의 김정일의 담화에 선명히 나타나 있다. 이 담화가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1년 후의 1987년 7월인데 1년 동안 비공개에 부쳐진 것은 이 담화의 내용이 구소련과 중국을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대국이나 선진국이라고 하여 언제나 옳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며 그들 나라의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이 전부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것은 아니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이 담화에는 미공표의 부분(제3장)이 존재하는데 그 곳에는 구소련·중국의 체제개혁을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북한의 경제발전전략 70년의 회고와 향후 전망, 양문수, 2015, 통일정책연구 24권 2호, 43p)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중국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중국은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개혁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1989년 천안문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개혁파인 자오쯔양(趙修業)이 당서기에 물러나 연금되었으며, 덩샤오핑도 권좌에서 물러나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장쩌민(江澤民)이 자오쯔양의 뒤를 잇게 되었다. 천안문 사태이후 개혁정책은 정체되었으며, 정권내부에서 정책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으나, 덩샤오핑은 1992년 남방(우한(武漢),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상하이(上海) 등)을 순회(남순강화)하면서 경제개혁을 더 빠르게 추진할 것을 요구하였고 개혁정책은 변함없이 추진되었다.

북한은 합영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인하여 원래 120여 개였던 기업이 1993년이 되면 20여 개(와다하루키, 북한현대사. 226p)로 줄어들면서 유명무실화 되었다.

UNPD / 사진=UNDP 트위터 캡처

7) UNDP의 북한 지원

북한은 경제발전을 위하여 합영법제정 등 외국자본유치추진외에 1980년대 들어서면서 UNDP(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유엔개발계획), UNIDO(United Nations Industrial Development Organization, 유엔공업개발기구)등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UNDP는 개발도상국의 경제, 사회적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만들거나 관리하는 일을 주로 하는 1965년 설립된 UN산하의 국제기구이다. UNDP는 저개발국을 대상으로 소득 향상, 건강 개선, 민주적인 정치, 환경 문제,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의 개발에 관련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전세계 170여 개국에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UNDP는 1965년 독립하여 경제적 어려웠던 싱가포르에서 싱가포르의 장기도시개발계획인 Concept Plan을 수립을 지원하였고, 이 계획에 따라 개발을 추진한 싱가포르는 가장 성공적으로 도시를 개발한 국가가 되었다. UNDP는 1966년부터 2009년까지 남한에 농촌개발, 수자원 관리, 산업개발, 환경보호, 사회발전 등 270개 이상의 개발사업에 총 1억 70만 달러 규모의 지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UNDP는 1970년대 말부터 베트남(1978)과 중국(1979)을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베트남과 중국의 시장경제시스템 도입을 제도정비도 지원하였다.(UNDP 홈페이지)

북한은 1979년 UNDP에 가입하였으며 1980년 12월 평양상주대표부가 개설되었다. UNDP는 1990년까지 2차에 걸려 4200만 달러 상당의 자금과 기술지원을 하였다. 1차는 1980~1986년까지 2050만 달러를 투입하여 공업, 과학, 수산업, 수송, 통신 등 8개 분야 23개 사업을 추진하여 6개 사업을 완료하였으며, 2차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2166만 달러를 들여서 7개분야 45개 사업을 추진하여 5개 사업을 완료하고, 나머지 사업은 이후에도 계속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북한경제학습, 연하청, 2002, 한국학술정보)

* 1차의 주요사업은 남포항시설현대화, 신성천-평양 간 철도자동화, 평성반도체공장 등이며 2차의 주요사업은 기상위성수신소, 종자가공, 옥수수품종개량, 항공관제시설현대화, 시멘트생산기술지원, 광섬유 통신신개발사업 등이었다.

북한은 이외에도 1980년말부터 UNDP 등으로부터 외자유치를 위한 투자환경개선, 법 및 제도의 정비 등에 대한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UNDP와 협력은 나선경제자유무역지대 지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북한 평양에는 UNDP, FAO(유엔식량농업기구), WHO(세계보건기구), UNFPA(유엔인구기금), UNESCO 등의 국제기구의 직원이 상주하면서, 식량지원사업, 개발지원사업을 펼치고 있었으나, 코로나 19로 현재는 직원 대부분이 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北영변 핵시설. /사진=연합

8) 핵발전소 건설 추진

전력은 산업화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2018년 남한은 전체 전력소비량((52만 6,149GWh) 중 산업용이 29.23GWh로 전체의 56.7%를 차지하였다.(한국그린캠퍼스 협의회) 전체 전력 중 50%이상이 산업분야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전력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다.

북한은 1970년대 오일쇼크, 소련 및 중국의 지원축소 등으로 인하여 1970년대부터 전력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1980년 경제발전을 위하여 전력생산 확대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다. 전력생산확대 정책은 외국인투자유치를 목적으로 추진된 정책은 아니었지만, 외국인투자를 유치를 위해서 안정적인 전력공급은 필수적이었다.

북한은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10대 전망목표’를 발표하면서 연간 전력 1000억 kW생산을 가장 먼저 내세웠으며, 수력발전, 화력발전소 증설 외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원자력발전 추진은 경제외적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경제적인 목적도 있었다.

북한이 원자력발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1979년의 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국제석유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북한은 외채상환이 불가능할 정도로 외환사정이 어려웠으므로 북한은 매장되어 있는 우라늄을 사용할 수 있고, 발전비용이 저렴한 원자력발전을 추진하였다.

국제적으로 원자력발전의 확대는 오일쇼크와 관련이 있었다. 원자력발전은 1950년대 시작되었으나, 1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발전비용이 저렴한 원자력발전소가 여러 나라에 건설되었다. 또한 1960년대부터 화석에너지에 의한 오염이 문제가 되면서, 오염물질을 거의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발전은 방사능오염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청정에너지로 각광을 받았다.

북한이 원자력발전을 추진한 또 다른 이유는 남한의 원자력발전과도 관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은 1978년 4월, 고리원전 1호기를 가동하면서 세계에서 21번째로 원자력발전소 보유국이 되었으며, 1977년 고리원전 2호기, 1981년에는 영광원전 1,2호기를 착공하면서 원전력 발전을 확대하였다. 1990년 남한은 전체 전력생산량의 49%를 원자력 발전으로 충당하였으며, 전력난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원자력발전은 국력, 과학기술의 역량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북한은 1970년대말 자체적으로 우라늄광산 탐사를 시작하여 2600여만 톤의 매장량과 400여만 톤의 가채량이 있는 것으로 확인하였고(북한 핵문제의 전개과정과 해결방안, 구본학, 2015) 1980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영변에 5MW급 실험용 원자로 건설을 착공하여 1985년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1985년 전력발전을 위한 50MW급 흑연감속로 방식의 원자로를 착공하였으나, 1986년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사고로 중단되었다. 이후 북한은 흑연감속로 방식이 아닌 안전성이 높은 경수로방식의 원자로(440MW급, 소련형 VVER 방식)를 소련으로부터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1990년 소련의 붕괴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때 원자로 건설이 검토되었던 부지(함경남도 신포시)는 1990년대 후반 KEDO의 경수로 건설부지가 되기도 하였다.

평양대마방직공장
남북합영기업인 평양대마방직에서 북측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글과 무관). /사진=연합

9) 남북관계 개선과 교역의 추진

1980년대 북한은 남한과 경제교류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경제적인 목적보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남북관계를 접근하였으며, 이에 따라 순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1984년의 남북경제회담 그리고 1980년말의 교역의 시작 등은 그 이후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1980년대 초 남북관계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북한은 남한의 정권에 대한 비난을 지속하였고 1983년에는 미얀마의 아웅산묘역 테러사건이 일어나면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1984년 남한 경기도 일원의 큰 수재가 발생한 후 북한 적십자가 쌀과 시멘트 지원을 제의하였고, 남한적십자에서 지원을 수용하면서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 북한의 수제지원을 계기로 남한의 신병현(申秉鉉)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가 남북한경제회담을 제안하였고, 북한이 받아들이면서 1984년 11월 15일 판문점에서 남북경제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회담에서 남북은 물자교류 품목, 상품거래의 방식 및 결제은행, 경제협력공동위원회와 분과위원회 설치 등을 논의하였다.

또한 1985년에는 광복40주년을 맞아 이산가족고향방문과 예술단 상호방문이 성사되었다, 이산가족상봉행사는 6.25전쟁 후 최초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88 서울올림픽의 공동개최에 대하여 협의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나, 1986년 1월 북한이 남북경제회담에 팀스피릿훈련을 이유로 불참을 통보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철언, 한시해라인은 여전히 가동되어 1989년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의 방북,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남북탁구단일팀 등에 역할을 하게 된다. (서울밀사 평양밀사 4. 85년 장세동 평양행, 중앙일보2000.05.18.)

올림픽공동(분산)개최문재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중재로 1988년 초까지 이어졌으나, 북한이 10개종목과 축구 전경기를 평양에서 할 것으로 요구하여 합의가 결렬되었으며, 북한은 서울올림픽에 불참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1988년까지 남북회담을 이어가면서도 남북교역 및 경제협력에는 소극적이었다. 남북교역이 시작된 것은 1988년 노태우대통형의 7.7선언(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이 계기가 되었다. 이 선언은 6개항으로 △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 이산가족 생사 확인 적극 추진 △ 남북교역 문호개방 △ 비군사 물자에 대한 우방국의 북한 무역 용인 △ 남북 간의 대결외교 종결 △ 북한의 대미·일 관계 개선 협조 등이 주요내용이었다.

7.7 선언 후 최초의 남북교역은 1988년 (주)대우가 홍콩 중개상을 통해 북한의 도자기 519점을 반입한 것이었다.(통일부 홈페이지) 그 후 효성물산이 1989년 전기동(Electrolytic Copper Cathode 200t)을 반입하였다. 남북교역은 급속히 증가하여 1990년에는 1억 달러에 달하였다.

1989년에는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경협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정주영회장은‘금강산관광개발에 대한 의정서’를 체결하였으며, 그 외에도 △ 원산 수리조선소, 원산 철도차량공장과 합작투자회사 설립, 생산제품 러시아로 수출 △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소금, 코크스, 천연가스 등 경제성이 있는 분야에 남북 공동 진출 등의 사업을 합의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이 금강산관광사업은 바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안기부는 북한과 합의가 무효라며, 북한에서 기자회견한 내용을 문제삼아‘국가보안법’을 적용하려고 했으며, 비밀리에 추진 중이었던 2차 방북은 일본 언론의 폭로로 북한이 반발하면서 무산되고, 이후 북핵위기, 정주영회장의 대통령 선거출마등으로 인하여 1998년이 되어서야 추진할 수 있었다.(남북경협뉴스. 2019.9.30.)

1980년대 북한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어려운 국내경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내부개혁, 외국인투자유치, 국제기구와의 협력, 관광사업 추진 등을 시도하였으나,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변화를 모색하는 소극적인 정책, 잦은 정책변화, 투자자의 방문제한, 계약의 불이행, 실무자들의 경직된 태도 등으로 인하여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또한 외국인투자유치정책 실패 외에 1980년대의 전시성 대규모 건축물 건설과 1989년 평양에서 개최한 세계청년학생축전도 북한경제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김정일의 후계자로서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건설한 기념비적 건축물 건설과 서울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하여 개회한 세계평양학생축전은 산업생산설비 투자를 어렵게 하였다. 특히 세계청년학생축전은 경기장 건설비외에 참가자의 체제비와 일부 참가자의 참가비도 부담하여, 행사에 45억 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 축전에 투입되는 비용의 일부를 소련, 동구권등 사회주의국가에서 지원받기로 하였으나, 1989년 동구권의 체제전환, 1990년 소련연방의 해체로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재정적 어려움을 더욱 심화되었다.

1980년대 북한경제를 어렵게 한 또 하나의 요인은 군사비였다. 1980년대 동서진영간 갈등이 격화되고, 남한의 군사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하여 북한도 군사비를 증가시켜야 했으므로 북한은 GDP 대비 군사비 비중이 20%를 넘었고, 군복무기간이 10년에 늘리게 되었다. 군복무기관 증가에 따라 청년의 노동력도 활용할 수도 없었던 것도 북한경제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남한은 1980년대 GDP 대비 군사비 비중이 5%정도였다.

북한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가운데 더욱 어려운 1990년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