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80년 전 김일성 구한 소련군, 북러 동맹 상징되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8일 북한 라선시와 러시아 하산을 잇는 두만강자동차다리가 준공됐다고 밝혔다. 신문은 전날(7일) “야꼬브 노비첸꼬명칭 두만강자동차다리 준공식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경도시 라선시와 러시아 국경도시 하산에서 동시에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령한 이후, 이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라 중 하나가 북한이었다. 북한은 유엔의 러시아 침공 규탄 결의에 반대표를 던졌고, 이후 러시아에 대규모 탄약과 무기를 제공했다. 급기야 사실상 군사동맹 성격을 갖는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인민군 병사들까지 파병했다.

최근에는 두 나라를 잇는 첫 자동차 다리까지 개통됐다. 흥미로운 것은 다리의 이름이다. ‘야코프 노비첸코’. 80년 전 김일성의 목숨을 구한 소련군 장교의 이름이다.

야코프 티호노비치 노비첸코(1914~1994)는 시베리아의 트라브노예 마을에서 우크라이나계 이주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그는 목동과 농장 노동자, 철도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성장했다. 1938년 소련 붉은군대에 입대해 극동 지역에서 복무했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소련의 대일전에 참가한 뒤 한반도 북부에 주둔한 소련군의 일원으로 평양에 배치됐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3·1운동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집회 도중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가 있던 연단을 향해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당시 소련군 소위였던 노비첸코가 수류탄을 집어 들었고, 몸으로 폭발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과정에서 오른손을 잃고 왼쪽 눈을 크게 다치는 등 몸 곳곳에 중상을 입었다.

1990년 북한연구소가 펴낸 『북한민주통일운동사』에는 당시 사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 실려 있다.

아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김일성의 연설이 시작된 지 1분도 못 되어 김형집(金亨集)이 서 있는 주변이 어수선해지면서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았다. 김형집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류탄을 안주머니에서 뽑아 손에 쥐고 서 있었고, 이를 발견한 경비원들이 기겁하여 김형집 곁으로 벌떼같이 다가들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김형집은 이성렬(李聖烈)의 거수 신호도 기다릴 여유 없이 김일성이 서 있는 연단을 향해 수류탄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김형집이 던진 수류탄은 연단 바로 앞에 떨어져 굴러갔고, 이를 소련군 소령이 집어서 다른 곳으로 던지는 순간 무서운 음향과 함께 폭발하여 소련군인의 손목을 끊어 놓았다. 김일성은 혼비백산하여 강연단에서 내려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위 증언에서는 노비첸코의 계급을 ‘소령’이라고 적었지만 실제 당시 계급은 소위였다. 또 사건 발생 시점이나 노비첸코가 수류탄을 처리한 방식에 대해서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른 증언이 존재한다.

당시 암살 시도에는 백의사 계열 인사들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형집 등 일부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다른 관련자들은 도주했다. 김형집이 이후 시베리아로 보내져 처형됐다는 후대 증언도 있지만, 그의 정확한 생사와 재판 경위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노비첸코는 치료를 마친 뒤 고향인 트라브노예로 돌아갔다. 한때 그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가 수여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북한은 1949년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소련도 1951년 적기훈장을 수여했다. 그렇다고 그가 소련 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영웅이 된 것은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노비첸코는 고향에서 비교적 조용히 생활했다. 전환점은 1984년이었다.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이 자신을 구해 준 노비첸코를 찾으면서 두 사람은 38년 만에 다시 만났다. 같은 해 7월 노비첸코는 북한을 방문해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후 북한은 그를 대표적인 ‘국제주의전사’로 적극 선전하기 시작했다.

1984년 5월 25일 야코프 노비첸코에게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한다는 내용의 북한 중앙인민위원회 정령. /사진=노동신문 화면캡처

김일성은 노비첸코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데도 관심을 보였다. 1985년 북한과 소련은 합작영화 『영원한 전우』를 내놓았다. 러시아에서 『위업을 위한 1초』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1946년 3월 1일의 사건과 노비첸코의 삶을 소재로 했다. 북한에서는 적극적으로 소개됐지만 소련에서는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노비첸코는 1994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그해 7월 8일 사망한 김일성보다 정확히 다섯 달 뒤였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접한 노비첸코는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북한과 인연을 이어갔다. 다만 북한 체제와 관련한 정치적 논란에 대해서는 “우리 가족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거리를 둬왔다.

그리고 2026년, 그의 이름은 다시 역사에 등장했다. 북한 나선과 러시아 하산을 잇는 사상 첫 자동차 다리가 완공됐고, 두 나라는 이 다리에 ‘야코프 노비첸코’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6년 김일성의 목숨을 구한 소련군 장교의 이름이 정확히 80년 뒤 김정은과 푸틴의 밀착을 상징하는 다리에 붙은 것이다.

노비첸코가 당시 수류탄을 집어 들지 않았다면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80년 전 평양의 한 광장에서 시작된 한 소련군 장교와 북한 지도자의 인연이 오늘날 러시아의 전쟁과 북러 군사동맹의 시대에 다시 소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기묘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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