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당국이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는 ‘영원’이다. 김일성은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불렸고, 김정일은 ‘조선노동당의 영원한 총비서’이자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인민은 ‘영원히’ 조선노동당을 믿고 따라야 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김일성-김정일주의의 기치를 들고 나가야 한다.
김정일 체제 초기의 ‘유훈통치’도 이런 영속성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김일성이 죽은 뒤에도 공화국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며, 그는 ‘영원한 주석’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의 최고 권위로 계속 존재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김정은은 달랐다. 그는 2012년 4월 부친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하고 자신은 새로 만든 당 제1비서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2021년 1월에는 자신이 직접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됐다.
《조선말대사전》에서 ‘영원’은 ‘끝이 없이 오래 계속되는 것;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이나 상태’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2012년 4월 11일부터 2021년 1월 10일까지의 기간’이라는 두 번째 뜻을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김정일의 ‘영원한 총비서’라는 칭호 자체가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들이 똑같은 총비서 직함에 오르면서 ‘영원’이라는 말의 정치적 의미가 무색해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단절은 2023년 말부터 본격화된 대남 통일노선의 폐기였다. 김일성은 줄곧 통일을 국가와 민족의 최고 과제로 강조했고, 김정일 역시 ‘김일성 유훈 관철’을 내세우며 이를 계승했다.
김일성의 유훈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려면 무엇보다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인 1990년대의 발언을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출판한 《김일성전집》에서는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확인할 수 있다.
- “조국을 둘로 갈라놓는 것은 민족 앞에 천추를 두고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됩니다.” – 「민족의 대단결로 조국통일을 이룩하자」(1991년 12월 6일), 『김일성전집』 제91권, 542쪽.
- “민족의 대단결을 위해 애쓰는 사람은 통일을 원하는 애국자이고 민족의 대단결을 방해하는 사람은 통일을 반대하는 매국자입니다.” – 「민족의 대단결로 조국통일을 이룩하자」(1991년 12월 6일), 『김일성전집』 제91권, 538쪽.
- “만일 우리가 《두개 조선》을 조작하려는 분렬주의자들의 책동을 허용한다면…이렇게 되면 우리는 력사 앞에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를 계속 높이 들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 「온 민족이 단결하여 조국통일을 앞당기자」(1990년 8월 18일), 『김일성전집』 제89권, 373~374쪽.
- “만일 우리 세대에 조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분렬된 조국을 후대들에게 넘겨준다면 선조들과 후대들 앞에, 민족과 력사 앞에 죄를 짓는 것으로 됩니다.” – 「우리 나라의 통일은 조국통일3대원칙에 기초하여 실현하여야 한다」(1990년 9월 21일), 『김일성전집』 제89권, 402쪽.
- “만일 우리가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두개 국가》의 공존체제를 만들어 놓는다면…우리 민족은 영원히 《두개 국가》로 갈라져 살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 「민족의 대단결로 조국통일을 이룩하자」(1991년 12월 6일), 『김일성전집』 제91권, 540쪽.
- “조국통일의 과업을 후대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세대에 조국을 통일하여야 합니다.…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조국을 통일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과업은 없습니다.” –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1991년 8월 1일), 『김일성전집』 제91권, 2쪽.
- “오늘 조국통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애국은 없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조국통일을 위하여 보람 있게 살아야 합니다.” – 「조국통일을 위하여 헌신하는것은 가장 훌륭한 애국이다」(1994년 4월 20일), 『김일성전집』 제94권, 316쪽.
이 ‘교시’를 문자 그대로 오늘의 김정은에게 적용하면 상당히 기묘한 결론에 이른다. 김일성의 기준대로라면 ‘두 개 국가’를 주장하고 통일을 후대의 과제로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현재의 노선은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분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북한 국가사상의 한 가지 본질적인 특징이 드러난다.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를 지키고,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을 관철하며, 당과 체제를 결사옹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주민들에게는 이 모든 것에 흔들림 없는 충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과거의 유훈과 현재 최고지도자의 노선이 충돌할 경우 어느 쪽이 우선하는지는 김정은 시대가 이미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노동당 규약도 이를 숨기지 않는다. 당원의 첫 번째 의무는 ‘당중앙의 령도에 끝없이 충실’하는 것이며, 당의 노선과 정책은 ‘무조건 접수하고 철저히 관철’해야 한다. 결국 북한 정치에서 가장 높은 원칙은 과거의 특정한 교시나 정책 그 자체라기보다 현재의 당중앙, 궁극적으로는 현직 최고지도자의 결정이라고 보는 편이 현실에 가깝다.
어제까지 ‘영원히’ 지켜야 한다던 원칙이라도 오늘 최고지도자가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면 의미가 달라진다. 김정은이 통일정책을 뒤집은 사례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통치 원리는 이념의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르지만, 지도자 개인에 대한 복종이라는 통치 기술의 측면에서는 나치 독일의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를 떠올리게 한다. 나치당 조직편람에 제시된 당원의 행동원칙 가운데는 “Der Führer hat immer Recht”, 즉 ‘지도자는 언제나 옳다’는 문구까지 있었다.
이를 북한식 표현으로 바꾸면 그다지 낯설지 않다.
‘수령은 언제나 옳다.’
북한의 노래 「우리는 맹세한다」에는 ‘위대한 당의 령도를 끝까지 받들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북한 정치가 실제로 작동해 온 방식을 생각하면 조금 고쳐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위대한 당의 령도를 새로운 지시가 나올 때까지 받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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