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김일성이 만들지 않은 ‘전승’

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7일 ‘전승절'(한국전쟁 정전협정체결일) 73주년을 맞아 “온 나라가 경축 분위기로 설레인다”라고 보도했다. 사진은 평양 시내 건물에 내걸린 ‘위대한 전승의 명절 7·27’ 경축 현수막. /사진=노동신문·뉴스1

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3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은 이날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 이른바 ‘전승절’로 기념한다. 그러나 7월 27일은 평화조약을 통해 전쟁이 완전히 끝난 날이 아니라, 교전 당사자들이 전투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한 날이다. 한반도에는 여전히 정전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결과를 보더라도 북한의 ‘승리’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북한 정권은 전쟁 전 통제하던 속초·양양 등 동해안 일부 지역을 잃었다. 반면 38선 이남이던 개성 일대는 북한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군사분계선 중부와 동부에서 38선 이북의 상당한 지역이 유엔군과 대한민국의 통제 아래 남았다.

또한 당시 김일성은 ‘승리자’가 아니었다. 최종 정전 결정 과정에서도 주도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1951년 3월 서울 재수복 이후 전선은 다시 38선 부근으로 올라갔다. 그해 6월 중순부터 전선은 사실상 고착됐고, 7월 10일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시작됐다. 이 무렵 양측은 상대를 군사적으로 완전히 굴복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51년 중반에는 정전 협상을 추진할 군사적 조건이 상당 부분 갖춰졌던 것이다.

그러나 협상은 2년 넘게 이어졌다.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가 첨예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특히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포로의 강제송환을 인정할 것인지가 마지막까지 남은 핵심 쟁점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1951년에 끝나지 못한 책임을 특정 지도자 두 사람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다만 정전을 늦춘 정치적 요인도 분명히 존재했다. 한 사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그는 북한 정권이 존속하는 상태에서 전쟁을 멈추는 데 반대했다. 1953년 6월에는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해 막바지 정전 협상을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소련의 최고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미군과 중국군이 한반도에서 장기간 소모되는 상황이 소련의 전략적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김일성이 조기 정전을 원했음에도 소련이 1951년 이후 무기 지원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며 전쟁을 장기화시켰다는 연구도 있다.

6·25전쟁은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남침 계획을 제안하고 박헌영 등이 이에 동조했지만, 스탈린의 승인 없이는 실행될 수 없었다. 정전 결정에서도 소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말렌코프·베리야·흐루쇼프 등을 중심으로 출범한 소련의 집단지도체제는 한국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후 공산 측이 포로 문제에서 새로운 제안을 내놓으면서 정전 협상은 빠르게 진전됐다. 스탈린의 사망은 2년 가까이 이어진 협상의 교착을 푸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정전협정 서명 과정에도 직접 관여했다. 소련 측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이 판문점 서명식에 참석할 경우 이승만 측이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며, 김일성이 직접 판문점에 가지 않도록 권고했다. 또한 펑더화이가 북한 부수상과 함께 판문점에서 협정에 서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실제 서명 절차는 소련의 권고와 다르게 진행됐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현장에서는 조선인민군·중국인민지원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유엔군 측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이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이후 김일성과 펑더화이, 마크 클라크가 각자의 지휘부에서 협정문을 재가·서명했다.

소련의 권고가 문자 그대로 집행되지는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남일이 판문점에서 서명했다는 사실만으로 당시 김일성이 이미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권을 확립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문서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정전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이 평양이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내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김일성은 게오르기 말렌코프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감사 전문을 보냈다. 1953년 7월 29일자 전문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쏘베트 련맹이 조선인민에게 주는 거대한 사심없는 원조와 지지는 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여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는 3년간의 간고한 전쟁에서 우리가 쟁취한 승리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되고 있으며….”

당시의 김일성도 소련의 원조와 지원이 전쟁 수행의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중국의 역할은 더욱 직접적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고, 만주 지역을 후방기지로 제공했다. 소련은 북한과 중국이 필요로 한 무기 대부분을 공급했다. 북한의 산업 기반이 미군의 폭격과 후퇴 과정에서 거의 붕괴된 상황에서, 중국과 소련의 군사·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북한은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2025년 7월 27일자 『로동신문』 사설의 서술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사설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탁월한 군사사상과 독창적인 전법”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전쟁 당시 김일성이 인정했던 소련의 지원이나 중국인민지원군의 역할은 서술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모든 공로가 김일성 개인의 영도에 집중됐다.

북한이 오늘날 기념하는 ‘전승’은 1953년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정전 이후 김일성 개인의 권위를 강화하고 세습 체제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정치적 서사에 가깝다. 김일성이 시작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끝낼 수 없었던 전쟁, 중국군의 참전과 소련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정권을 보존한 전쟁이 오늘날에는 ‘위대한 수령이 이룩한 단독 승리’로 다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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