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평양의 의전결례, 그리고 제국의 종말

김일성
1945년 평양시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사진=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화면캡처

큰 격변에는 늘 조연이 있다.

역사는 그들의 선택 위에 조용히 기대면서도 금세 잊어버린다. 빅토르 그리신(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Гришин) 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레오니드 브레주네프(Леонид Брежнев) 집권 말기 내내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재직한 그는 한때 ‘차기 서기장’으로까지 거론되던 신중한 보수파였다.

그는 끝내 미하일 고르바초프(Михаил Горбачёв)를 지지했다. 개혁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 또 다른 선택지였던 그리고리 로마노프(Григорий Романов)는 스탈린주의적 강경파로, ‘모스크바파’를 숙청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신은 네바강에서 날아올 매서운 칼날보다는 스타브로폴(Ставрополь) 출신의 젊은 법률가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신이 그 선택으로 자신이 아는 세계가 보존되리라 믿었다면, 그 부메랑은 결국 그 자신에게, 그리고 거의 모든 이에게 되돌아왔다. 1987년까지도 서방의 대중문화는 소련이 23세기까지 버틸 수 있다고 상상했지만, 1991년 소련은 사라졌다. 공산당은 금지되었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해체됐다. 강등과 치욕을 맛본 그리신은 자신을 만들어 준 체제가 솔기부터 터져 나가는 모습을 마지막 몇 달 동안 지켜봐야 했다.

황혼기에 그는 고르바초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독설 사이에, 고르바초프가 처음 어떻게 떠올랐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숨어 있었다.

장소는 1980년 10월, 평양.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였다. 겉으로는 ‘불변의 친선’을 내세웠지만, 당시 소련과 북한의 관계는 형편없었다. 모스크바(Москва)는 평양이 베이징(北京) 쪽으로 기우는 태도에 분통을 터뜨렸고, 북한이 광복의 공을 붉은 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가 아닌 김일성 개인에게 돌리며 역사를 다시 쓰는 개인숭배에도 혐오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체면상 소련은 대표단을 보내야 했다.

처음 크렘린은 대표단 단장으로 고르바초프를 보내려 했다. 그는 젊고 유망했고, 무엇보다 정치국 ‘후보위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발끈했다. “후보위원이라니, 모욕이다.” 그는 마치 왕이 후작(侯爵) 대신 공작(公爵)을 요구하듯, 정치국 ‘정위원’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결국 그리신이 평양행 임무를 맡았다. 대우는 싸늘했다. 무대의 중심은 갓 독립한 짐바브웨(Zimbabwe)의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였고, 소련 대표단은 평양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멀리 원산(강원도)으로 밀려났다. 그리신은 뻔히 결론이 정해진 청중 앞에서 사회주의 연대와 소련의 평화애호를 읊는 판에 박힌 연설을 해야 했다.

모욕을 안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자신을 보낸 당 서기 콘스탄틴 체르넨코(Константин Черненко)에게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이런 난처한 일이 없도록,” 고르바초프를 정치국 정위원으로 승격시키자는 제안이었다. 체르넨코는 동의했고, 대회가 끝난 지 일주일 뒤인 1980년 10월 21일, 중앙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комитет)는 곧 결정을 내렸다. 고르바초프의 승진이었다.

그 결재 도장은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무게를 바꾸어 놓았다. 정위원 지위는 그의 격을 높였을 뿐 아니라, 다음번 서기장 공석이 생겼을 때 최고 자리에 오를 실질적 자격을 부여했다. 그리고 1985년 3월, 장례 행렬의 끝에서, 김일성의 허영과 그리신의 상한 자존심이 떠밀어 올린 그 사람이 초강대국의 키를 잡았다.

아이러니는 계속됐다. 불과 5년 만에 소련은 대북 지원의 고삐를 죄었고, 6년 남짓 지나 소련과 몽골의 공산 체제는 무너졌다. 별자리를 바꾼 것은 유가 하락, 장기 침체, 아프가니스탄 전쟁, 부패한 경제 같은 거대한 힘들이었다. 그러나 기념비에는 새겨지지 않는 작은 힘들도 있었다. 평양의 의전 결례, 모스크바의 자존심, 그리고 10월 어느 날 ‘승인’ 도장이 찍힌 인사 서류 같은 것들이다.

현상 유지를 지키려 했던 신중한 관료 그리신은 해체의 길을 닦는 데 일조했다. 더 높은 대접을 요구한 가부장 김일성은 북한을 더욱 고립시킬 개혁가의 등장을 앞당겼다. 예절 시비 덕에 오르게 된 고르바초프는 결국 세계지도를 다시 그려, 예절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 국가원수가 됐다.

우리는 역사가 위인과 거대한 담론이 곧은 선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이라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리신의 이야기는 더 지저분하고 불편한 진실을 암시한다. 제국의 경첩은 멍든 자존심과 빠진 직함만큼 얇을지도 모른다. 소련의 붕괴는 한 편의 연설이나 단일한 설계도로 쓰이지 않았다. 여백에도 쓰였다. 그 여백에는 ‘후작’으로는 부족하고 ‘공작’이 필요했던 자리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기억해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체제는 외부의 압력이나 내부의 부패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지위 계산의 미세한 오류, 하찮은 모욕, 체면을 지키려는 인간의 욕망 같은 것에도 흔들린다. 1980년 평양에서 김일성은 ‘정위원’을 요구했고, 모스크바는 응했다. 5년 뒤, 그 결정으로 힘을 얻은 사람이 제국의 볼트를 풀기 시작했다. 역사의 문이 돌아간 이유는 누군가 새 경첩을 설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더 그럴듯한 직함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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