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30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사망하였다. 이 사람만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결과는 소련의 멸망, 동유럽의 민주화, 그리고 냉전의 종결이었다. 이번 칼럼에서 고르바초프가 지도자가 된 과정을 꼼꼼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고르바초프의 전임자인 콘스탄틴 체르넨코 서기장은 1985년 3월 사망하였다.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 중 후계자 유력 후보자 4명이 있었다. 스탈린주의자 로마노프 레닌그라드 책임비서, 강경파 그리신 모스크바 책임비서, 온건파 그로미코 외교부 장관 그리고 개혁파 고르바초프 중앙위 비서였다.
서기장 선거는 사실상 3단계로 진행되었다. 우선 전임 서기장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장을 뽑아야 했다. 위원장은 바로 서기장 유력 후보자가 되었다. 그 다음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고 중앙위에 서기장 후보자로 추천할 인물을 뽑았다. 마지막으로 중앙위는 정치국의 추천을 수락하였다. 이 마지막 단계는 형식적인 행사에 불과하였다.
그리신, 그로미코 그리고 고르바초프 3명은 공동 목표가 있었다. 바로 로마노프가 서기장으로 추대되는 걸 막자는 것이었다. 그로미코와 고르바초프는 로마노프가 서기장이 되면 즉시 개혁파 소속인 그들을 해임할까 두려워했다. 그리신 입장에서 레닌그라드 책임비서의 승리는 곧 모스크바 책임비서의 패배였다.
또한 고르바초프에게 유리한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체르넨코가 사망한 날 로마노프는 모스크바에도 없었고 자기가 통치한 레닌그라드에도 없었다. 그는 리투아니아에 있었고 날씨 때문에 모스크바에 빨리 출현하지 못 했다. 두 번째 요인은 고르바초프가 누구보다 빨리 체르넨코의 사망에 대해 알게 된 점이었다. 체르넨코의 건강을 책임진 의사 에브게니 차조프는 누구보다 빨리 고르바초프에게 연락하였고 서기장의 사망에 대해 알려 주었다.
고르바초프의 첫 시도는 그리신 지지였다. 그는 정치국이 이 강경파 정치인을 지지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리신 추대로 로마노프의 추대를 방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고르바초프는 그리신에게 접근하였고 혹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장이 될 마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정치 모략에 경험이 많는 그리신은 젊은 고르바초프를 보았고 자신이 아니라 바로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위원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신은 고르바초프 위원장을 지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점은 물론 그가 고르바초프를 서기장으로 추대를 지지한다는 암시였다.
그리신은 자신과 같은 늙은이가 지지를 받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1984년 2월 안드로포프,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사망해서 ‘젊은 지도가 필요하다’는 분위기는 팽배했기 때문이다. 젊은 후보자는 곧 로마노프와 고르바초프였고 그리신은 이 두 명 중 고르바초프가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얼마 후 그로미코 장관의 아들이 고르바초프를 찾았다. 그는 아버지가 정치국 회의에 ‘발의 역할’을 할 준비되어 있고 보상으로 최고 소비에트 상임 위원장 자리를 받고 싶어한다고 전달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이 요청을 수락하였다.
‘발의 역할’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나? 이는 정치국 회의에 관한 표현이었다.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장은 이 회의를 주재했지만, 자신이 아니라 그가 발언권을 준 사람이 서기장 후보자를 제안할 수 있었다. 그로미코가 그런 역할을 할 준비되어 있다고 한 셈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어떤 위원이 제안하면 의견 일치를 반드시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다른 사람을 제안하면 볼셰비키 전통의 엄중한 위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리신도 그로미코도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면서 스탈린주의 부활에 대한 로노모프의 꿈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로마노프가 발언권을 얻기 전 정치국 위원 6명이 만장일치로 고르바초프를 지지해 로노모프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로미코는 정치국의 뜻을 중앙위에 전달하였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라는 젊은 이상주의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 서기장으로 추대되었다.
미국 ‘높은 성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 시리즈에 ‘운명을 인도하는 자는 극소수다’라는 말이 나온다. 특히 당시 1985년 이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서기장으로 누구를 추대할지 모스크바 택시 기사, 리가에서 복무하는 군인, 예레반 중학교 선생님 등 일발 소련 주민들의 의견을 물어본 자는 없었다. 결정을 내린 사람은 최고 엘리트의 몇 명뿐이었다. 자조프 의사, 날씨 때문에 이륙을 거절한 로마노프 비행기 승무원 등 알맞은 때 알맞은 장소에 있는 일반인 몇 명도 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변화는 일반적으로 인민대중이 아니라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한다. 1980년대 폴란드 원탁회의, 체코슬로바키아 신사 혁명, 베를린 장벽 붕괴, 모스크바 주민의 강경파 쿠데타 항의,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사형 등 사건은 로마노프 아니라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어야 가능해졌다. 로마노프가 이겼으면 세계 공산주의는 21세기까지 살아남지 않았을까.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이 역사 교훈들을 잘 배웠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다 1989~90년 북한은 유학생들을 소환하였고 소련을 더 이상 우호국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로동신문에 고르바초프에게 축하 전문은 나왔다. 그러나 북한은 고르바초프를 흐루쇼프처럼 ‘사회주의를 배신한 자’로 부르기를 시작하였다. 고르바초프를 통해 김정일은 양보를 하지 않고 개혁하지 말라는 교훈을 배웠다. 중국, 베트남 등 개혁에 성공한 공산주의 정권들은 있었지만 김정일은 개혁이 망국에 가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는 고르바초프 또는 차우셰스쿠의 운명을 피하고 싶어했다.
1985년 3월 소련과 함께 전체 공산권은 더 좋은 미래를 위한 기회를 받았다. 북한도 그런 기회가 있을까. 현재는 김정은의 급사 또는 김정은의 어떤 커다란 실수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권력을 갑자기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수 시나리오’도 무시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일으킨 전쟁을 보면 권력자가 오랫동안 통치해도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권력에 도취한 자가 ‘역사 앞에 업적’ 또는 ‘운명’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나오지는지도 우리는 목도하게 됐다.
역사를 결정한 중대한 시점은 존재한다. 1985년 3월 10~11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서기장으로 추대는 곧 그런 시점이었다. 북한에서 언제 그런 시점이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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