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8일 여름 막바지에 있는 해군절을 맞아 여느 해군부대와 마찬가지로 서해함대 사령부 직속 29여단 군인들도 들뜬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맞았다.
북한 해군의 명절인 해군절에 군인들은 체육 경기나 오락을 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면서 즐겁고 경쾌한 분위기로 하루를 보낸다. 무엇보다 이날 하루만큼은 어려운 군량미 사정도 잠시 잊고 소박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하루 세끼 챙겨 먹을 수 있어 군인들은 며칠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해군절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렇게 맞이한 해군절 당일 아침 식사를 끝낸 29여단 군인들이 지휘부 앞마당에 체육 경기를 하기 위해 집합하던 중 별안간 비상소집령이 떨어졌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부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휘부와 모든 구분대는 병실과 교양실 실내에 머물고 여단 총 직일관이 인원 점검을 돌며 구분대장들은 부대 무기고 열쇠를 회수해 참모부에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갑작스러운 소동은 전투원 김모 소위가 여단 야외 훈련장에서 발생한 사고로 손가락이 잘린 채 군의소에 구급으로 실려 와 생긴 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여단 보위부 수사과는 군의소에 입원해 있는 김 소위를 대상으로 해군절 당일 벌어진 사건의 경위를 조사했다. 그리고 40일 뒤 김 소위가 군 보위국 노동연대에 보내지면서 사건의 베일이 하나둘 벗겨졌다.
해군 서해함대 사령부 직속 해상저격 여단인 29여단에 입대한 지 3~4년이 된 김 씨는 전투 정치 훈련에 누구보다 성실히 임하고 생활에서도 모범이 돼 또래들보다 빠르게 소위로 진급했다. 북한은 일반 구분대 하전사 나이라 할지라도 능력이 검증되면 해상저격 소부대 전투원들에게 장교 격인 소위의 군사칭호를 부여한다.
김 씨는 당시 여단에 세차게 휘몰아치던 ‘백두의 훈련열풍’ 속에 특수훈련에 매진했고, 부대에서는 그를 자폭 용사, 바다의 결사대, 만능 싸움꾼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다 2020년 5월의 어느 날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편지는 고향에 있는 그의 누이가 쓴 것으로, ‘가족이 농촌지출대상자 명단에 들어 강원도 법동군 농장에 강제 탄원을 당하게 됐다. 기업소에서는 살던 집을 내놓으라고 해 앞이 막막하다. 네가 제대되면 법동 산골로 와야 한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양잿물을 마셨고 아버지는 그것을 말리다가 같이 죽자고 마시면서 중태에 빠져 생사를 오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 소위는 중대, 대대 지휘관들에게 편지 내용을 그대로 알리면서 고향 방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대, 대대 지휘관들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내적으로 김 소위의 동향을 잘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 소위는 훈련과 근무 생활에 충실해 왔다는 자신감으로 요청한 고향 방문이 거절된 것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 이후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없던 그는 해군절 당일 새벽 보초 근무를 서다 본인의 손가락에 총을 쏴 자해했다. 부상을 입으면 제대시켜줄 것이고 그렇다면 부모님 임종이라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단에서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로 알고 있었으나 보위부 수사과 일꾼들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나게 됐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진지한 대화로 김 소위를 설득해 사건의 경위를 밝혀낸 여단 보위부는 편지를 보고도 대책을 세우지 않은 지휘관들도 문제가 있다고 봤고, 김 소위의 자해 사건도 정치적으로 다루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단 정치부의 의견은 달랐다. 정치부는 이번 사건이 해군절에 이뤄진 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김 소위에 대해 상급 지휘관들에 대한 악감정에서 의도적으로 명절 분위기를 깬 위험분자라며 군법으로 처리할 것을 결정했다.
김 소위는 악명높은 군 보위국 노동연대에 보내져 살아나오지 못했다. 그의 부모님도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누이는 이후 법동군 농장원으로 진출령을 받았으나 행방불명됐다. 꽃다운 20대를 국가에 바치고 조국을 위해 충성한 대가는 결국 죽음이고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