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4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조 바이든이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일본 스가 총리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을 두 번째 오프라인 정상회담 상대로 선택한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통적 우방이자 혈맹(린치핀: linchpin)인 한국을 가치와 동맹에 기초한 바이든식 세계질서 재편 과정(‘America’s back’)에서 미국 쪽에 확실히 붙들어 두기 위한 전략이다. 두 번째는 침체된 국내경제 회복과 IT·반도체 등 미래산업 육성을 위한 파트너십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세 번째는 미국의 역대행정부가 풀지 못한 북핵문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지도자 간 의견 조율, 디딤돌 마련이다.
한편 한국 정부의 목표는 튼튼한 한미공조 체제 구축을 통한 ▲코로나19 백신 확보, ▲한반도평화체제 구축, ▲국익 창출의 전기 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의의를 가진 워싱턴 한미정상회담(5.21)이 양측 모두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두고 종료된 지도 어느덧 10여 일이 지나고 있다. 2017년 5월 취임 이후 전통적인 한미동맹 강화보다는 ‘전시작권권 조기전환 추진’,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자주·균형자적 입장을 취했던 문재인 정부가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거의 180도 유턴하는 공동성명문(A4 8쪽 분량)을 내놓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모처럼 대다수 국민들이 이념과 진영을 떠나 “만약에 보수정부가 회담에 나섰더라도 한미 간 과거-현재-미래를 총망라한 이 같은 합의문을 도출해 내지는 뭇했을 것이다”라며 박수를 보냈다. 물론 앞으로 정부가 합의문대로 후속 조치를 이행해 나갈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아마 남한 국민들 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한국과 미국이 이 정도로 찰떡궁합을 보일지는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재인-바이든 정상회담이 끝난 지도 열흘이 지났는데 북한 지도부나 외무성 차원의 공식반응이 없는 게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동안 김정은은 바이든 시대에 대비하여 많은 것을 준비해 왔다. 새해 벽두부터 8차 당대회(1.5~12)를 개최하여 핵전략 고도화·자력갱생을 기조로 하는 ‘정면돌파전 시즌 2’, ‘핵·경제건설 병진노선 2.0’ 노선을 확정하고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압박하였다. “내 입장은 이렇다. 당신이 변하라”는 일종의 선제적인 기선제압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연후에 한국과 미국의 향후 대북정책에 대한 수많은 도상 시나리오를 만들고 보완해 왔을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고난의 행군’,‘ 부패와의 전쟁’ ‘비사회주의 척결’ 등을 강조하며 진지전, 장기전 태세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첫 반응은 지난 4월 말이었다. 바이든 정부가 4월 30일(현지시간) 대북정책 검토를 마쳤다고 하면서 ‘단호한 억지와 외교’를 기조로 ‘잘 조정되고 실용적인 외교’를 전개해 나가겠다고 선언하자, 준비된 사수(射手)처럼 김여정, 권정근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 외무성 대변인 등이 대남-대미 비난성명(5.2)을 일제히 쏟아냈다.
“확실히 미국 집권자는 지금 시점에서 대단히 큰 실수를 하였다. 미국의 새로운 대조선(북한) 정책의 근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선명해진 이상 우리는 부득불 그에 상응한 조치들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권정근)
이후 세계는 북한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등 후속 행동을 예의 주시하였다. 그러나, 김정은은 반전을 택했다. 북한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김정은이 부인 리설주를 비롯 측근들을 대동하고 군인가족예술소조 공연을 관람한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5.6)했다. 김정은의 연출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실무자들이 일단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자신은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향후 한국과 미국의 구체적인 행동을 지켜보겠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추정된다(2021.5.11. 데일리NK ‘최근 북한의 대남-대미 침묵이 갖는 의미’).
북한이 5월 초 릴레이 대남-대미 비난담화를 발표한 이후 언 한 달이 지나고 있는데, 특히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인권 문제까지 공동성명서에 명기했는데도 열흘이 지나도록 조용하기만 하다. 매우 특이하다.
단지, 5월 31일 조선중앙통신이 국제평론가 김명철 명의로 한미 미사일 지침 종료 합의와 관련 첫 반응을 내놓았는데, ‘대화 립서비스-대결 골몰의 이중 언행, 호전적 정책’이라고 폄하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일을 저질러 놓고는 죄의식에 싸여 이쪽저쪽의 반응이 어떠한지 촉각을 세우고 엿보고 있는 그 비루한 꼴이 실로 역겹다”고 비하하였다.
북한의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또다시 도를 지나쳤지만(정부는 공식적으로 항의 해야 한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번에 주목해야 할 점은 한미정상회담 직후가 아니라 열흘이 지나고서도 정부당국자가 아닌 논평원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북한의 처지이다. 이는 북한이 아직도 미국의 대화 제의를 수궁할 지 여부에 대해 장고를 거듭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김정은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폭풍전야의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제 결심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리용남 주중 북한대사 간 ‘팔짱걸이를 통한 우의 과시 회동’ 사진 공개(5.27)와 조선중앙통신의 김명철 논설 보도(5.31)는 김정은의 본격적인 운신을 앞둔 정지작업, 마중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한미정상회담 결과는 분명히 김정은의 눈에는 성이 차지 않는다. 자신들이 요구했던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 대북 제재 해제를 비롯한 대북적대시 정책 철회와 같은 구체적인 당근(carrot)이 전혀 없다. 김명철이 말한 대로 판문점선언·싱가폴 정상회담 합의 존중 등과 같은 ‘립서비스’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다. 오히려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 재개를 시사하는 ‘연합방위태세 강화’를 포함해 김정은의 역린(逆鱗)인 ‘북한인권’ 문제까지 건드렸다.
외무성도 이런 상황에서 미북-남북대화 복귀를 제언하는 보고서를 감히 올릴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시기적으로도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 실시 여부가 조만간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게다가 6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2022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전과 7월 도쿄하계올림픽 불참을 이미 통보해 놓은 상태이다.
따라서, 북한이 한국과 미국이 설정한 운동장으로 선뜻 나올 가능성은 현재로선 그다지 크지 않다. 오히려 한 번 더 어깃장을 놓아 향후 협상장에서의 몸값도 올리고, 핵전력도 고도화하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수를 둘 것으로 예상된다.
그 방법은 김정은은 직접 나서지 않고, 김여정이나 외무성 대변인 담화 등으로 한미정상회담의 이중성과 호전성을 강하게 비판한 후 자위권 차원에서 신형전략무기 시험발사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에 김정은이 당정치국 회의나 당중앙군사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거나 방중한다면 상황은 보다 엄중해 질 것이다.
신형전략무기 도발은 북한이 2019년부터 ‘크리스마스 선물’, ‘충격적인 행동, 새로운 전략무기 공개’ 등으로 미국을 압박해 왔던 비장의 카드이다. 지난해 10월 당창건 75주년과 올해 1월 8차 당대회 열병식을 통해 모형은 공개했지만, 아직 시험발사는 하지 않았다. 신형 SLBM 장착 잠수함 건조식, 시험발사 등은 북한 핵개발의 정수이자 일종의 게임체인저이다. 따라서 김정은은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까지는 일종의 냉각기-대결기로 설정하고, 내부 단도리와 북중관계 공고화에 더욱 주력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의지를 시험할 가능성이 크다.
이같이 상황이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통일부는 이인영 장관을 비롯해 대변인이 상식 이하의 대통령 비난에 대해서는 한마디 반박도 못 하고 ‘남북 대화’만을 천편일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한미정상회담 결과로 남북, 또는 북미 간에 대화를 재개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형성됐다.북한이 내적 고심을 마무리하고 대화와 평화의 시계를 앞당기기 위한 장으로 나올 것을 기대한다”(통일부장관), “개인명의의 글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정부가 지금 단계에서 직접 논평하기보다는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북한의 반응 등은 신중한 입장에서 지켜보겠다”(대변인)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에 대한 소망은 알겠지만, 정확한 현실인식이나 위기의식, 결기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을 막말로 비난했는데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내에서의 대응과는 너무나 판이하다. 최소한의 국격부터 생각해 보길 바란다. 평화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국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굴종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지금은 현실을 보다 냉철하게 직시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신중하게 대응해 나가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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