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당(黨) 세포비서대회에서 ‘고난의 행군’을 언급했다. 당 세포란 당의 최말단 조직으로 5명에서 30명까지의 당원이 속해있는 조직을 말하고 세포비서란 그 조직의 책임자를 말한다. 당의 말단조직 책임자 1만 명 가까이가 모인 대회에서 ‘고난의 행군’을 언급한 것이다.
다시 꺼내 든 ‘고난의 행군’
김정은 총비서는 “우리(북한)의 전진도상에는 많은 애로와 난관이 가로놓여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당 제8차대회 결정관철을 위한 투쟁은 순탄치 않”다고 자평했다. “그 어디에 기대를 걸거나 바라볼 것도 없”으며, “그 어떤 우연적인 기회가 생길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며 현 정세에 대한 판단도 밝혔다.
그러면서, “나(김정은)는 당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하여 각급 당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간고’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보면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다. 따라서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이라는 말은 그대로 해석하면 이전보다 더 어려운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겠다는 뜻이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 역사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수십 만 내지 수백 만이 굶어죽었다는 시기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북한 역사에서 ‘고난의 행군’은 세 차례 정도 있었다.
첫 번째는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의 시기로,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부대가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감행한 행군을 말한다. 이 시기 김일성 부대는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모진 추위와 가슴까지 차오르는 눈길 속에서 식량난을 겪으면서도 일본군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여기에서 유래된 ‘고난의 행군’ 정신은 어떠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패배주의를 모르는 낙관주의 정신, 불굴의 혁명정신으로 정의된다.
북한 역사에서 두 번째로 ‘고난의 행군’이라는 구호가 등장한 것은 1950년대 6‧25 전쟁 이후 시기다. 6‧25 전쟁 이후 경제복구에 골몰하던 북한은 ‘고난의 행군’ 정신을 내세우며 강력한 사상, 교양 학습 수단으로 활용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부터 1997년 말까지를 지칭하는 ‘고난의 행군’은 따라서 세 번째 ‘고난의 행군’이다. 1980년대 말 구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로 대외적 고립 상태에 처하게 된 북한은 이 시기 극심한 경제침체와 연이은 수해로 식량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상황에 놓였다.
김정은의 ‘고난의 행군’
김정은 총비서가 ‘고난의 행군’을 다시 꺼내든 것은 이전과 같은 ‘고난의 행군’을 겪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정신으로 지금의 난관을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 표명은 대외관계 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력갱생으로 버티겠다는 최근의 정책기조를 반영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제재 해제나 경제지원에 연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김 총비서는 사상통제를 다시 한 번 강력히 주문했다.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와의 투쟁을 강조하면서 자라라는 청년세대들의 교양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밝혔다. 외부문물의 침투로 사상이 이완되는 것을 막고, 청년들을 김정은의 결사옹위대로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개조’ 사업을 적극 벌여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북한이 갈수록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김 총비서는 “인간개조 사업을 적극 벌이며 집단 안에 서로 돕고 이끄는 공산주의적 기풍이 차넘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개조 운동이 힘있게 벌어지던 천리마시대처럼 뒤떨어진 사람들을 사회주의적 근로자, 애국적인 근로자로 만드는 사업을 전당적으로 조직전개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21세기에 다시 꺼내든 ‘고난의 행군’과 ‘인간개조’ 사업. 외부와의 문을 닫아걸고 김일성 일가의 나라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이 같은 퇴행적인 움직임이 북한 주민들의 삶에 심각한 고난으로 다가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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