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광원 공훈설계가, ‘영도자 업적 훼손’으로 추방된 사연이…

[북한 비화] 위락시설 수질관리 창의적 아이디어 낸 충직한 일꾼, 일순간 종파분자로 몰락

창광원수영장
평양시 창광원 수영장. / 사진=조선의오늘 홈페이지 캡처

북한의 대표적 위락시설인 ‘창광원’이 지난해 3월 개원 40주년을 맞았다. 창광원에 대해 가장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대부분의 평양 시민들이 ‘오래된 시설이지만 여전히 잘되고 있는 수질관리 체계’를 꼽는다. 그러나 창광원 수질관리 체계 최초설계자인 오 씨와 그 가족의 비극은 40년 세월 속에 여전히 감춰져 있다.

북한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의 ‘친애하는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인민봉사시설 건설에 주력하던 1970년대 말. 평양시 도시건설사업소의 평범한 설계가였던 오평준(당시 40대)은 조직의 추천으로 창광원 설계·시공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창광원 건설의 핵심은 다름 아닌 수질관리 문제였다. 건설지휘부와 간부들 사이에서는 수영장, 목욕탕의 물을 여과해 재사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었는데, 그때 현장기술과 소속 시공자였던 오 씨는 대동강이 멀지 않으니 직접 끌어다 깨끗한 물을 쓰자는 창의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김정일은 중앙당에 올라온 여러 방안 중 오 씨의 아이디어를 꼽아 비준했고, 그렇게 창광원은 오 씨의 수질관리 체계를 적용해 1980년 3월 21일 성공적으로 개장했다. 오 씨는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공훈설계가 칭호를 받고 내각의 책임 간부로 승진했다.

창광원이 지어진 지 10년이 지나 당 역사연구소에서는 “(창광원 건설) 당시 모든 일군(일꾼)들이 여과제를 사용하자고 했지만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인민을 위한 봉사시설의 수질은 최상으로 보장해야 한다시며 대동강물을 직접 끌어와 늘 깨끗한 새 물을 유지하도록 온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셨다”는 내용의 당 역사 문헌자료를 배포했다.

아이디어의 당사자인 오 씨도 이 문헌자료를 접했으나,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까지 자신이 한 일이라고 터놓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과 자식들의 미래가 수령에게 달려 있다 믿었기에 그저 모든 것을 당에 의탁하고 살아간다는 마음가짐으로 맡은 일에만 열중했다. 이렇듯 충성심이 높고 성실했던 오 씨는 평생을 국가에 바친 몸으로 묵묵히 일했다.

그렇게 오 씨는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다. 그런데 2014년 11월 어느 날 새벽, 은퇴한 그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던 평양시 중구역 경흥동 자택에 별안간 인민보안성(현 사회안전성) 특별보안국과 인민군 보위사령부(현 보위국) 군관 10여 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당의 권위와 위신, 위대한 장군님의 업적을 훼손시킨 현대 종파분자로 판명됐으니 조직적 조치에 따르도록 하라”고 호령했고, 그길로 오 씨(당시 73세)와 그의 부인, 아들 내외와 손주 2명은 산골로 추방됐다.

오 씨 가족이 향한 곳은 함경남도 부전군이었다.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고 작물도 적은 부전군은 오 씨 일가에게 지옥이 아닐 수 없었다. 오 씨 내외는 결국 추방 이듬해인 2015년 7월 눈을 감았다. 아들 내외와 손주들은 지금도 이곳에서 북한 사법 기관의 감시 아래 쥐 죽은 듯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내막을 알고 있는 북한 내부 소식통은 데일리NK에 “당시 사건은 2013년 12월 장성택 숙청으로 당의 유일적지도체제를 확고히 세워야 한다는 명목 하에 이뤄졌다”면서 “수령님과 장군님의 혁명 업적을 칭송하는 데 있어서 사소한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모든 대상은 직위, 공로를 불문하고 대열정리하라는 원수님(김정은)의 내적 방침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진행된 당 대열정리 사업 과정에서 창광원 수질관리 설계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오 씨와 같은 충직한 일꾼이 애꿎게 피해를 본 것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해 3월 22일 “사시장철 인민의 웃음소리 넘쳐흐르는 종합적인 편의 봉사기지로 자랑 높은 창광원이 첫 문을 연 때로부터 어느덧 40년 세월이 흘렀다”며 창광원 개원 40주년 소식을 전했다.

당시 보도에는 창광원을 건설할 당시 간부들은 한 번 채워 넣은 물을 여과해 재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김정일의 지시로 대동강 물을 끌어와 늘 깨끗한 새 물을 유지하게 됐다는 내용도 어김없이 담겼다. 그러면서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날 밤 창광원 관련 문건을 살폈다고도 했다.

오 씨의 창의적인 발상은 여전히 김 씨 일가의 위대성, 인민애를 부각하는 좋은 재료로 쓰이고 있다. 그 대가로 그와 그의 가족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철저히 매장당했다. 이를 두고 소식통은 “여기(북한)서는 간부나 기술자들이 수령보다 앞서가는 생각을 하면 숙청 대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