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벌어진 해군사-정찰국 아내들의 주먹다짐…무슨일?

[북한 비화③] 정찰국 중시 김정일 말한마디로 외곽으로 쫓겨난 해군사...아내들은 이사 반대 버텨

김정일_해군사령부
김정일이 조선인민군 해군사령부를 방문했다고 노동신문이 지난 2002년 보도했다. /사진=노동신문 캡처

2000년 초반 북한 해군사령부(제572군부대) 가족들은 갑자기 평양시 주변 구역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들이 당시 자강도로 쫓겨난 이제순 군관학교(용성구역 림원동) 부지로 옮겨갔다는 뜻으로, 이 또한 김정일의 정찰국 현지 시찰 당시 ‘말씀’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해군사령부는 동·서해함대를 아우르는 곳으로, 일명 해군의 총참모부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한다. 때문에 비록 평양 외곽이지만 그래도 시내와 교통도 좋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3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데일리NK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 부지는 김일성이 직접 잡아주었고, 이에 따라 북한 해군 안에서는 ‘불변의 자리’라는 자부심이 커져만 갔다.

그러나 김정일의 한마디로 이 같은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당시 그는 ‘정찰국(현 정찰총국)’을 현지지도하면서 당(黨) 중앙과 통일전선부와 가까운 곳에 두도록 하자고 하면서 부지를 골라보라고 정찰국장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바로 정찰국장은 지형적 특성으로 볼 때 해군사령부 자리가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김정일은 흔쾌히 승낙하였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은 대남공작을 맡은 정찰국을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2001년부터 2002년 사이 1년 동안 해군사령부는 이제순 군관학교 자리로, 정찰국은 해군사령부 자리로 이전하라는 지시를 직접 하달했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의 말 한마디로 부대 가족들이 모두 강제이사를 해야만 하는 일이 재차 발생한 셈이다.

이번 대이동은 해군사령부가 먼저 이제순 군관학교 자리로 옮기는 것으로 시작됐다. 물론 낮이 아닌 밤에 은밀히 이동해야 했다. 주민들이 이동 사실을 알 수 없도록 하고 적들의 위성에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군 당국은 해군사령부 부대 이전에 인민군 별기동대 부대를 총동원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별기동대는 ‘동풍호’들로 이루어진 기동부대로서, 차 번호 앞 빨간 동그라미 안에 빨간색 오각별이 표기되어 있다.

이같이 일종의 김정일 특혜를 받았지만, 이사 첫날 해군사령부 지휘부 군관들과 가족들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주변 구역으로 쫓겨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아내들의 반발은 더욱 컸다. 대부분 중심 구역에서 시집 온 여성들이라 이번 사태를 자존심이 상하는 일로 여겼다.

즉 아내들은 “중심구역에서 살다가 형제산구역에 시집온 것만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보다 더한 용성구역으로 어떻게 나가라는 거냐”면서 완강한 뜻을 내비쳤고, 남편들은 이사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부대 통근’을 택해야 했다. 이에 지금까지도 서포 통근 버스가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끝까지 이사 안 간 해군사령부 측과 이사 온 정찰국 측의 싸움이 붙었던 것이다.

일단 정찰국 측은 부대 주택이 부족한 걸 문제 삼았다. 그들은 “장군님(김정일) 명령 관철에 관한 해군의 태도에 문제 있다”면서 “전투력이 없는 오합지졸”이라는 인신공격까지 일삼았다.

해군사 측도 만만치 않았다. 뒤에서 수군대는 정찰국 측을 직접 찾아가 주먹다짐을 벌였다고 한다. 싸움은 두 부대의 정치부와 보위부가 중재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될 수 있었다. 결국 정찰국 측은 “농촌구역으로 쫓겨난 심정을 이해한다”면서 살림집 증축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사 완료 후 사태가 조금 진정된 이후인 2002년 5월 1일 김정일은 해군사령부 지휘부를 방문했고, 기념촬영을 하는 방식으로 ‘위로’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