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력포 공개처형장에 섰던 30대 임산부, 지금은 어디에?

[북한 비화] 출산 직후 무기징역형 받고 개천교화소에 수감돼

미국 인권단체 북한인권위원회가 공개한 북한 평안남도 개천교화소 위성사진. /사진=북한인권위원회 홈페이지

일명 ‘자애로운 어버이’ 김정은은 집권 초기부터 교화소 내 체계 정돈에 나섰다. 그중에서 관심을 둔 건 바로 ‘형기(刑期) 문제’였다. 여기에서 그는 ‘형기 절반은 무조건 살게 하면서도 배려해야 한다’는 일종의 할아버지 김일성의 유훈(遺訓)을 이어받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미 2012년 김일성 생일(4월 15일) 100돌을 맞아 대사령(특사)를 한 차례 준 상태였다. 또한 그 무렵에 황해북도 승호교화소(8교화소), 평안북도 동림교화소 등을 단련형 시설로 한 단계 낮추기도 했다.

특히 김정은은 2013년 열린 전국 당(黨)세포비서 대회에서 ‘99%의 잘못이 있다 해도 1%의 량심(양심)만 남아있다면 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서한을 배포했다. ‘인권 볼모지’라는 악명을 떨쳐 보낼 본격적 행보에 나선 것이다.

그러던 중, 2014년 10월 어느 날, 주민들에게 ‘인민의 지도자’의 면모를 각인시켜줄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데일리NK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양시 력포구역 장마당 강둑 아래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군수물자 담당자였던 군관과 그 안해(아내, 30대)가 군품 및 파동을 몰래 밀수했다는 혐의로 공개처형이 예고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말뚝에 묶여 있었고, 입은 틀어막혀 있었다. 눈도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는 상태였다.

군(軍) 해당 검찰소와 재판소 간부가 먼저 판결문을 읽고 사격을 담당하는 군인들이 열을 맞춰 등장했다. 이후 ‘따당따당’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안해가 며칠 후 의식을 차린 곳은 아늑한 병원 침대였다. 어찌 된 일이었을까. 군 당국자는 남편은 먼저 총살당했고 총격에 기절했었는데, 그사이 내려온 중앙 지시에 사형집행이 돌연 중지됐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안해는 임신상태(4개월)였고, 공개처형에 관한 보위사령부 보고를 받은 김정은이 ‘어머니의 잘못을 태어날 새 생명에게도 책임을 지우는 것은 우리 당의 인덕정치와 배치된다’면서 중지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국을 들끓게 한 이 사건을 계기로 ‘원수님(김정은)의 은혜는 나라 앞에 죽을 죄를 지은 범죄자들에게도 따스히 비춰주어 그들의 운명을 보살펴준다’는 식의 교양 사업도 강화됐다.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는 ‘인덕 정치’ 선전에 좋은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렇다면 공개처형장에서 살아난 그 임산부 여인은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그는 이듬해인 2015년 아기를 낳은 후 몸도 추스르기 전 북한 보안 당국에 체포됐고, 무기형을 받아 바로 1교화소(개천교화소) 여자무기수 전담인 7관리과에 수감됐다고 한다.

원수님 말씀으로 극적으로 살아난 임산부 사형수. 대다수 주민은 아직도 그가 온전한 삶을 사는 줄 알고 있지만, 정작 그는 어린 아이와 평생 떨어져 살아야 하는 또 다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