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0일 북한에서 전격적으로 화폐 개혁이 발표됐다. 17년 만의 일이다. 전해지는 소식에 따르면 북한에서 모든 상거래가 중단되고 시장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었다고 한다. 물가가 하루사이에 폭등했다.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일부 주민들의 불만은 ‘저주’로 나타나고 있다고도 한다.
100대 1의 교환 비율도 그렇지만 10만원 또는 15만원 한도의 교환은 그동안의 장마당 물가에 비추어보면, 대부분의 기존 화폐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많은 북한 주민들의 속은 지금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북한 당국이 갑작스럽게 화폐 개혁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체제가 ‘정치 우선의 사회’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는 것 같다.
장마당에서의 상거래 활동이 늘어나고 시장 경제적 요소가 부지불식간에 퍼지고 있다고 해도 북한체제는 여전히 정치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것이 북한체제의 본질이며 따라서 그러한 관점에서 화폐 개혁의 전후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화폐 개혁은 다른 가용한 수단을 사용해서도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사용하는 극약처방이다.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른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극심한 인플레를 잡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물가 잡기는 부수적이다. 장사를 통해서나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돈을 환수하겠다는 것도 극히 부수적이다. 집안에 쌓인 돈을 끌어내겠다는 것도 다소 순진한 발상이다.
북한에서의 고도 물가 상승은 만성적인 공급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생산력을 증대해야 하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한다. 자본은 물론 원자재와 에너지가 부족하고 기술도 결핍되어 있을 뿐 아니라 노동력 또한 마찬가지다. 생산력을 늘려 공급을 증대시켜야 인플레가 어느 정도라도 잡히는 것이지 화폐량을 줄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2, 3년 동안에 걸쳐 북한 당국이 경제작동 방식을 과거로 되돌리려 시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금년도 신년 공동사설만 하더라도 자력갱생과 계획경제를 강조하였다. 바로 점차 해체의 위협에 도전받고 있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그 길로 확실히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주도 계획경제가 제대로 가동되려면 재정계획이 잘 이루어지고 이행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계획을 제대로 수립할 정도로 재정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피폐화로 사(私)경제가 신장되었고 돈은 민간에서 돌고 중앙으로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선중앙은행이 다시 돈을 찍어 내면 화폐량만 더 늘어나게 되며, 그 돈은 또 민간에서 사장된다. 국가 당국은 다시 재정고갈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당국은 재정실패를 책임지지 않고 북한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북한 주민들에 대한 엄청난 부채를 떼어먹는 것으로서 ‘북한판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악순환과정에서 북한 통치자에게 더욱 위협으로 등장하는 것이 당국과 주민 간의 고리가 단절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 활동이 늘어나면서 당과 국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통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많은 북한 주민들이 강압적 통제 아래 순응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당 및 국가와 상관없이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특히 사경제가 증대하면서 부를 축적하여 국가통제로부터 이탈하는 북한판 ‘자본가 계급’이 등장하였다. 북한의 통치자와 그 주변세력은 시장 활동 증대와 민간 영역에서의 부의 축적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고 두려워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150일 전투’, ‘100일 전투’ 등 전사회적 동원을 해보았자 별 소용이 없다. 전격적인 화폐 개혁은 시장 통제를 넘어 국가 통제시스템을 재정비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계획경제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일사분란하게 재정통제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며, 그 이면에는 김정일의 권력을 유지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정치 요인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 같이 못사는 북한 주민들이 이번 조치로 특히 희생을 볼 일부 돈 있는 사람의 ‘불행’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1990년 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대와는 다르다.
북한의 통치자 김정일은 2012년에 ‘강성대국의 문’을 열겠다고 호언장담해왔다. 그런데 그가 자랑하는 ‘정치강국’이나 ‘군사강국’은 경제의 뒷받침이 없으면 사상누각이 될 것이 뻔하다. ‘우리식 사회주의’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경제실패가 계속되는 상태에서 계획경제로의 회귀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은 정치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강압적인 통제 기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이번 조치를 피동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이미 장마당에서의 활동을 통해 시장경제가 필요함을 알았다. 화폐개혁은 북한체제의 한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북한 주민들의 불만이 얼마나 잠재워질 수 있을지 주목해볼 일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