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나 현재나 김정은의 비핵화의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인 가운데, 얼마 전 정의용 외교부 장관의 인사청문회 장소에서 발언은 필자로 하여금 아연실색케 했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져 나왔다.
3년 전의 상황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당시 정 장관(대북수석특사) 발언에 대해 칼럼(南 대북특사, 김정은 ‘비핵화 의지’ 제대로 확인한 건가?(평양포커스. 2018.3.9.))을 쓴 것이 있는데, 다시 한번 복기해 봤다. 김정은을 평양에서 만나고 돌아온 그는 김정은을 ‘솔직한 사람’이라고 자평했는데, 그 주된 근거로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때 정 특사의 메모장에는 김정은이 가장 강조했을 법한 ‘한미연합훈련 중단’ 내용이 적혀있었다. 필자는 한미군사훈련을 북한의 핵 도발을 촉발시킨 핵심요인이라는 빌미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칼럼을 통해 우려를 표했었다.
대북특사들이 평양을 떠나자마자 노동신문은 북한의 핵개발이 미국의 적대시정책의 산물이며 미국의 침략전쟁연습(한미군사훈련)의 결과물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다른 북한매체들은 한발 더 나아가 ‘주한미군철수’에 포커스를 맞췄었다. 북한의 이 같은 행태는 대북특사들의 암묵적, 아니 정식적인 수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한 쌍방은 ‘북한 체제안전의 보장’과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합의에 도달했었다.
그런데 정 장관은 당시, 비핵화 의지에 대한 김정은의 발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김정은이 선대 유훈을 따라 비핵화 의지를 표명했다는 식이었다. 이 시그널로 인해 한·미 양국은 김정은에게 2년 내내 질질 끌려 다니다가 남북, 북미관계는 더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 책임이 가장 큰 당사자가 다시 외교수장에 오른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인사 청문회에서 그의 발언은 그가 얼마나 우리 국민들을 우롱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정말 있었느냐는 여야의원의 질문에 그는 “한반도의 안보상황이 완전히 보장된다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대북특사 다녀온 지 3년 만에 정확한 워딩을 한 것이다. ‘한반도 안보상황의 완전 보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조건부적 핵포기 선언이다. 그렇다면, 그 선결 조건이 무엇인가. 과연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것인가.
한미에 대한 선결 조건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한미군사훈련중단’이다. 이것은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기자회견에서 공언한 바 있다. 그런데, 북한은 바로 비핵화로 가지 않고 핵동결에 머물렀다. 또 다른 선행조건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주한미군철수다. 적어도 주한미군철수 단계에서 핵 포기를 한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한반도 적화통일 단계를 염두 한 발언일 수도 있다.
이처럼, 대북특사들 앞에서 한 김정은의 발언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너무나 뻔한 얘기를 듣고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고 설레발쳤다는 것에 분통이 터진다. 이것이야말로 대국민 사기극이자 국가안보에 중차대한 위협을 가하는 범죄행위다.
문제는 이 정부가 김정은의 수에 넘어가거나 속아서 당한 것이 아니라 상호 교감 가운데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남쪽에서도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가 대북 특사단 방북 전에 주한미군철수를 언급했었다(2018.2.28.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워싱턴협의회 주관 포럼).
파장이 난 후, 뒤 늦게 김정은의 발언 전모를 공개하며 국민을 기만한 정 장관은 여전히 그 사특함을 버릴 용의가 없는 것 같다. 최근 그는 다시 낭설을 퍼트렸다. 김정은을 만난 세계 모든 지도자들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지난번 제8차 당 대회를 통해 ‘핵무력 증강’과 ‘핵 위협’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북한정권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대표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기만술은 북한이 잘 쓰는 방법인데, 이런 것도 따라할 심산인가. 한술 더 떠서, 남북-미북관계 파행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똘끼도 보여줬다(종전선언관련 발언 2.18).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2.12)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및 ‘한미공조’, ‘한미일 협력’ 방안을 교환했다고 했지만 같은 날, 미 국무부 대변인 브리핑을 보면, 한반도 비핵화가 아닌 북한의 비핵화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또한 북한의 핵 포기를 위한 핵심동맹국과의 긴밀한 조율뿐만 아니라 ‘역내 전체의 협력국들’과의 접촉도 강조한 만큼 북핵문제에 중국과 러시아까지 포함시킬 것이라는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필자는 바로 이전 칼럼에서 북한의 비핵화 해법으로 미국이 쿼드와 동북아안보협력체제를 아우르는 다자적 협력체제로 갈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핵심동맹인 한국이 쿼드에 들어오지 않고 중국이 주도하는 동북아안보체제로 기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처럼, 미국과 한국은 서로 아주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은 공개적으로 대북외교 파트너로 문재인 정부 패싱을 입에 담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국 갈등이 더 점화되는 쟁점이 생겼다. 바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한미 간의 충돌이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유엔 인권이사회 복귀를 선언했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는 인권을 중시하는 대외정책 기조를 천명한 바 있다. 또한 지난달 3일, 한국의 대북전단금지법과 관련된 미 언론의 질의에 미 국무부는 북한 내 인권 존중을 촉진하는 방안을 신중히 고심하겠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에 가서 북한인권문제를 거론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지난달 22일부터 3월 23일까지 진행되는데 블링컨 장관은 24일 기조연설에서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을 촉구했다. 그런데, 정 장관은 유엔 인권이사회 고위급 화상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도 22일 참석해 연설했는데 말이다.
정 장관의 불참 사유로 외교부는 업무 미 숙지를 들었는데,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온갖 설레발을 다 치며 도사흉내 내는 분이 북한인권문제는 막히는 게 많은가 보다. 그동안 얼마나 신경을 안 썼으면 임명되고 첫 번째 큰 외교무대에 나서지 못할 정도인가.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하다. 그냥 피하고 싶은 자리일 뿐이다. 그 이유는 여러 전문가들의 관측대로, 이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과 한중관계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대타로 나간 차관도 북한인권의 실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대북 인도적 지원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북한인권 침해를 성토하는 자리에서 대북지원을 말했다니 이처럼 어불성설이 있을까 싶다. 미국의 심기가 불편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현재, 정 장관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중국의 외교부장과 통화(2월 16일)하면서 시진핑 주석의 방한에 대해 조율했다. 더불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의 실질적인 여건 마련을 위해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약속했다. 왕이 부장의 방중요청에도 흔쾌히 응했다.
지금의 정장관의 행보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왕이 외교부장과 통화 후 18일에 그는 국회에 와서 한중 양국 교류 협력을 전면적으로 복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칼럼에서도 제시한 것처럼 북한을 포함한 3각동맹이 결성되기 일보직전이다. 한반도의 명운을 미국보다는 중국에 걸어보겠다는 심산인가. 이것이 뚝심인지 객기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남의 일이 아닌 만큼 조마조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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