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김일성-스탈린 음모, 수정주의 명백한 오류

▲ 6.25 전쟁 중 UN군이 동료 전사자의 유해를 지켜보고 있다

시인 구상씨가 얼마 전 지난해 85세로 생을 마감했다. 구상 시인은 한국전쟁을 예견하는 듯한 내용으로 유명한 1946년에 쓴 『여명도』(黎明圖)란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떠오는 태양 함께 피토하고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라고 했다.

구상의 시는 퇴폐적으로 아름다웠지만, 실상은 너무도 잔인했다. 한반도의 전역은 사나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세계 전사(戰史)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다.

3년의 한국전쟁에서 35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한국전쟁은 막대한 민간피해를 야기한 처참한 전쟁이었다. 또 한국군 40여만 명과 북한군 50여만 명이 사상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민족의 20% 가까이가 한국전쟁에서 죽거나 다쳤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욱이 유엔군 16만 명과 중국군 90만 명이 희생되었다.

처참한 전쟁 끝에 너무도 많은 피의 대가로 대한민국은 지켜졌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젊은이들과 함께 온 국민들이 합심하여 피 토하면서 대한민국을 지켰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세계 첨단산업을 이끄는 활기찬 시장경제와 세계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빛나는 민주주의의 나라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80년대 대학생, 브루스 커밍스에 속아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반세기 하고도 5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현실은 대한민국을 피로써 지킨 이들에 대한 존경보다는 학문적으로 이미 한물간 수정주의적 시각이 판을 친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상당수가 한국전쟁이 북한의 침략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조차 한국전쟁의 참모습이 심각히 왜곡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북한 공산군의 전면적이고 전격적인 남침에 의해 촉발되었다. 당시대를 살았던 분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비롯 중국, 소련은 전쟁 직후 일제히 한국의 대규모 공격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해왔다. 공산국가 특유의 모략전(謀略戰)이었다. 북한의 전쟁박물관에는 소위 ‘북침설’의 근거로서 해주지역에서 한국군의 대규모 공격을 표시한 지도를 걸고 있다.

유럽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 ‘북침설’을 수용하여 한국전쟁을 분석해왔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공산세력은 평화 애호 세력이기 때문에 침략을 강행할 리 없으며, 한국전쟁은 모순에 가득찬 자본주의 제국 미국이 획책한 것이 틀림없다는 논리였다. 한국의 침공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수정주의 시각이 국내에 열풍으로 다가온 것은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이 소개 되면서부터다. 80년대 독재에 대한 항거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이 땅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말보다 커밍스의 파격적인 시각에 열광했다.

실체적 진실 외면한 수정주의 사관

커밍스는 미국측의 방대한 자료를 비판적 입장을 통해 분석하여 전쟁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전쟁 책임이 공산측에 있지 않고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한국군의 해주에서의 침공을 계기로 자극 받은 북한이 시대착오적인 상황에 놓인 남한을 해방시키고자 확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을 내전(civil war)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세운 틀 속에 부합하는 자료들의 비판적 해석을 통해 분석하는 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군부독재, 광주항쟁, 민주화운동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종속이론과 함께 열풍으로 다가왔다. 경험에서 오는 기성세대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은 한국의 독재체제는 물론 전쟁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인식을 믿게 되었다.

국내에는 여전히 한국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이 뿌리깊지만, 학문적으로는 이미 한물간 이론으로 한국전쟁의 책임에 관한 것은 명명백백히 들어나 있다. 수정주의 이론이 무너지는 계기가 된 것은 냉전붕괴였다. 그때까지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전적으로 서방측 자료에 의존해왔으며, 공산측 자료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냉전이 붕괴되자 소련의 관계자들은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소련의 비밀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더 이상 수정주의 시각은 설 땅을 잃게 된다. 특히 1994년 6월 러시아 정부는 216점의 한국전쟁관련 자료를 한국정부에 제공한다.

구소련 자료, 스탈린과 김일성의 음모 규명

한국전쟁은 북한과 소련, 중국의 합의 아래 치밀하게 계획된 침공이었다는 점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정통적 시각에서 짐작은 했지만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음모가 명확하게 되었다.

커밍스는 냉전의 붕괴라는 환경 변화 하에 자신의 이론에 일부 수정을 가한다. 90년대 초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내란이기 때문에 누가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97년의 신간에서 ‘한반도의 국지분쟁을 전면 전쟁으로 격상시킨 중대한 책임은 김일성에 있다’고 지적하여 김일성의 책임에 더 무게를 두는 쪽으로 자신의 논리를 수정했다.

그러나 커밍스는 여전히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가 구비되어야 논의할 수 있다는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한국전쟁의 정설은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하여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 소련에서 발굴되는 자료들은 점점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라는 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노회한 스탈린은 혈기왕성한 김일성을 북한에 보내 한반도 혁명을 준비시키면서 기회를 노렸다. 소련은 북한군에게 전차, 전투기 등 충분한 전쟁장비와 물자를 제공하는 한편 북한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고문단을 파견했다. 한국전쟁의 실제 작전계획은 스탈린의 지침에 따라 소련군 장성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모택동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인 정예 2개 사단을 김일성에게 주었다. 이 조선족 부대는 침공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중국 공산화와 함께 남한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킨 미국의 소위 ‘애치슨 라인’이라는 전략환경 변화에 따라 스탈린은 드디어 김일성에게 전쟁개시를 허락한다.

중국군이 개입하기 전 한국전쟁의 초기 단계는 스탈린이 직접 모든 것을 지휘한다. 작전지침에서 북한지도부의 탈출문제에 이르기 까지 북한군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스탈린은 지시한다.

김일성, 한달간 모스크바 체류하며 침공지시 받아

2000년 러시아의 토르쿠노프(Anatory Vasilieveich Torkunov)교수가 쓴 『수수께기의 전쟁: 한국전쟁 1950-53』은 한국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토르쿠노프 교수는 한국전쟁이 명백히 소련, 북한, 중국의 합의하에 계획된 도발이었으며, 스탈린의 결정적 역할을 밝혀낸다. 이 책에는 한국전쟁의 준비, 개전 그리고 휴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소련의 역할이 방대한 구 소련의 자료를 통해 파헤쳐져 있다.

특히 현재도 접근이 불가능한 러시아 대통령 문서관, 즉 과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자료관에서 구소련 최고 레벨의 의사결정에 관한 자료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국전쟁 결정과 수행 과정에서의 소련의 역할을 철저히 해부하고 있다. 토르크노프의 책은 수정주의 시각이 얼마나 진실에서 벗어나 있는지 그리고 공산측의 모략에 말려들었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3월30일에서 4월25일까지 거의 한 달간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3차례의 회담을 통해 최종적으로 침공에 대한 결정과 작전지침을 받는다.

스탈린은 북한군의 대폭적 강화지원과 함께 다음과 같은 3단계의 작전을 지시한다. 우선 38선 부근으로 공격부대를 집결한다. 2단계로 북한이 평화통일에 대한 새로운 발의를 하고 이를 서울이 거부하면 옹진반도에서 진행되는 한국군 활동을 반격의 구실로 공격을 시작한다. 이는 누가 최초에 군사행동을 시작했는가를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단계로 전선을 확대하여 전격전을 행하여 남측이 반격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1950년 여름까지 북한군의 총동원을 결정한다.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직후,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조선측이 통일에의 착수를 제안한 것에 동의했다’고 밝힌 뒤 상세한 내용을 조선의 동지들이 전달할 것임을 알린다.

1950년 5월 13일 북경(北京)에 도착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에게 소위 ‘해방계획’을 상세히 설명했고 모택동도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은 발발한다. 이것이 반세기 가까이 숨겨져 있던 한국전쟁의 진실이다.

수정자의자들, 공산측 평화공세에 말려들어

커밍스를 비롯한 수정주의자들은 해주 주변 옹진반도에서의 국군과 유격대 활동을 들어 북침설을 주장하거나 내전이었기 때문에 누가 시작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왔다. 스탈린의 지시를 보면 공산측의 모략에 수정주의자들이 얼마나 잘 말려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스탈린은 평화공세에 대한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남침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한은 통일협상을 제의한 것이다. 1949년 9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도 평양의 소련대사에게 김일성과 박헌영이 평화통일공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준비, 기획, 작전에 이르기까지 총감독의 역할을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모택동을 전쟁의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자신은 막 뒤에서 감독의 역할을 했다. 스탈린의 역할에 있어서 결정판은 정전에 얽힌 비화이다. 전쟁의 시작을 지시한 것은 스탈린이었지만, 스탈린은 결코 정전을 지시하지 않는다.

결국 한국전쟁의 휴전이 결정된 것은 스탈린이 죽고 나서였다. 개전 1년후 늘어가는 피해 속에서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모택동과 김일성은 휴전을 모색한다. 모택동은 김일성과 그의 부하인 임표 등을 모스크바에 보내 스탈린에게 휴전의 허락을 요청한다. 스탈린은 휴전 협상은 수용했지만 죽을 때까지 휴전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은 3년이나 끌었고 그동안 수많은 남북한의 젊은이들이 삼천리 금수강산의 고지에서 피를 뿌리며 산화했다. 미국도 인적 물적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는 신생 중국이었다. 남북한과 유엔군의 사상자를 모두 합친 것만큼 수많은 중국 젊은이들이 타국 땅에서 죽어갔다. 비정한 스탈린은 철두철미하게 소련의 이익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보도한 강연회의 기사는 나를 무척이나 슬프게 했다. 커밍스의 강연이었다. 향후 북한은 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로 가야하며, 갈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커밍스는 과거 박정희 정권에 대해 누구보다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인물이었다. 그의 비판이 정당한 것이었다면, 커밍스는 최소한 북한은 절대로 박정희식 모델로 가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미국 Wisconsin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일본 慶應大學 大學院 法學科 政治學 博士
-외교안보연구원 교수(1991년)
-외교안보연구원 안보통일부장(1998년)
-주요 저서 <北韓核協商의 顚末: 非核化宣言에서 제네바 合意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