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판매소 현주소③] 양곡판매소 안착?…작황 호조 효과일 뿐

<편집자주>
북한 시장 물가가 급등하는 상황 속에서 당국이 식량 가격 안정화를 목적으로 운영 중인 ‘양곡판매소’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양곡판매소는 과연 북한 당국의 의도대로 주민들의 식량 부담을 덜어주고 있을까요? 데일리NK는 평양과 양강도 혜산시 양곡판매소의 공급 및 운영 실태를 취재하고, 실질적인 체감 효과에 대한 주민들의 생생한 의견을 들어봤습니다. 국가 식량 공급망의 현주소를 기획 시리즈로 집중 조명합니다.
북한이 스마트폰 전자결제 앱을 통해 ‘양곡구매권’을 발행하고 일부 양곡판매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지=구글 생성형 AI 모델 제미나이(Gemini)

북한이 양곡판매소를 운영한 지 5년여가 흘렀다. 현재 양곡판매소는 초기보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를 양곡 판매 제도 안정화로 보기보다는 지난해 북한의 곡물 생산량 증가에 따른 일시적 수급 개선의 효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해 작황 호조에 공급 숨통안정화됐다고 평가하긴 일러

지난달 말 이뤄진 본보의 취재에 따르면, 현재 양곡판매소는 보통 한 달에 두 차례 곡물을 판매하고 있다. 초기 때처럼 예고도 없이 문을 닫아 판매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렇게 양곡판매소의 곡물 판매가 예년보다 원활해진 것은 국가 유통망의 구조적 개선이나 운영 체계의 정착 때문이라기보다, 지난해 작황 호조로 국가가 확보한 곡물량이 늘어난 데 따른 일시적 효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지영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최근 판매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만으로 양곡판매소 운영 체계가 안정화됐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며 “지난해 곡물 생산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양곡판매소에 공급되는 곡물도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최 선임연구위원은 양곡판매소에서 판매되는 곡물의 품목 구성에 주목했다. 값이 비싼 쌀보다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옥수수 판매 비중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양곡판매소의 여력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다.

그는 “국가가 주민들에게 안정적으로 쌀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의 재정·수매 능력을 갖췄다면 쌀 판매 비중이 더 높아져야 한다”며 “옥수수 중심의 판매 구조는 양곡판매소가 아직 주민들의 식량 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정도로 안정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방증”이라고 평가했다.

남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도 “지난해 농촌진흥청이 발표한 북한 식량작물 생산량 추정 결과에 따르면 2025년 북한의 농업생산량이 전년보다 증가한 것으로 추정됐다”며 “생산량이 늘면서 공급이 상대적으로 안정화됐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농촌진흥청이 발표한 ‘2025년도 북한 식량작물 생산량’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식량작물 생산량은 총 490만톤으로, 전년 478만톤보다 12만톤(2.5%)이 증가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렇듯 현재 양곡판매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은 제도적 정착보다는 지난해 생산량 증가에 따른 일시적 공급 여건 개선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향후 작황이 나빠지거나 국가 수매 여력이 약화할 경우 양곡판매소의 곡물 판매 안정성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저소득층엔 완충역할가격·품질 문제에 시장 대체하긴 역부족

다만 양곡판매소가 저소득층의 식량 접근성을 일정 부분 높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주민들은 여전히 시장에서 품질이 좋은 쌀을 구매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에게는 양곡판매소가 최소한의 식량 확보 창구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보 취재에 따르면 일부 주민들은 양곡판매소에서 구매한 쌀을 시장에 되팔고, 그 돈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옥수수나 기타 곡물을 사 끼니를 이어가고 있다. 쌀을 직접 소비하지 못하더라도 양곡판매소를 통해 확보한 곡물을 현금화함으로써 식량 구매 여력을 일부 확보하는 식이다. 특히나 현금 수입이 부족한 저소득층에게 양곡판매소가 일종의 완충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최 선임연구위원은 “양곡판매소가 주민 전체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저소득층 입장에서는 접근 가능한 식량 공급 통로가 하나 더 생긴 셈”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양곡판매소의 한계도 뚜렷하다. 우선 양곡판매소의 판매 가격이 시장 가격과 비슷해지는 흐름이라 ‘국가 공급망’으로서의 가격 안정 효과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또 양곡판매소에서 판매되는 쌀의 품질이 시장보다 떨어진다는 점도 한계점으로 꼽힌다.

남 연구위원은 “국가가 농장에서 곡물을 수매할 때 시장보다 높은 가격을 보장하지 않는 구조라면 농장 입장에서는 질 좋은 곡물을 시장이나 다른 유통 경로로 돌리고, 상대적으로 질 낮은 곡물을 국가 수매에 낼 유인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결국 양곡판매소 곡물의 품질 문제는 단순한 관리 부실이 아니라 수매 가격과 유통 구조에서 비롯되는 문제”라며 “시장 논리로 보면 국가가 충분한 가격을 지급하지 않는 한 품질 문제는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고질적 한계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양곡판매소가 앞으로도 보조적 식량 공급망으로 기능할 뿐 시장을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더욱이 주민들은 가격뿐 아니라 품질, 구매 가능 시기, 곡물 종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식량을 구매하는데, 양곡판매소는 이러한 측면에서 아직 시장보다 경쟁력이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남 연구위원은 “북한 당국이 양곡판매소를 통해 시장 의존도를 낮추고 국가의 식량 통제력을 회복하려 하고 있지만, 가격과 품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주민들의 시장 의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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