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한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한 가운데, 평생 선전의 전면에 섰던 전쟁 노병(老兵)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 서사와 현재의 대남 노선이 충돌한다는 취지의 불만을 토로했다가 그 가족들이 당국으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함경남도 소식통은 21일 데일리NK에 “함흥시 한 구역의 전쟁 노병들이 최근 주민들에게 ‘한국이 이제 우리 민족이 아니라 적대국이라면 그동안 학생들에게 설명해 온 조국해방전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며 “이후 해당 노병들의 가족이 구역당에 불려 가 경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북한은 그동안 한국전쟁을 ‘미제와 괴뢰도당으로부터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쟁’,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으로 규정하며 한국전쟁과 관련한 역사 교육에서 민족 중심의 서사를 유지해 왔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전쟁 노병들은 각종 강연이나 사상교양 사업에서 이러한 서사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직접 겪은 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현 세대에 애국심을 심어주는 선전 활동에 적극 동원돼 왔다.
그러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이후 ‘민족’ 개념을 빠르게 지워 나가면서, 체제의 핵심 선전 도구인 노병들 사이에서조차 혼란과 불만이 일고 있다는 게 소식통의 설명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실제 함흥시의 한 노병은 주민들이 모인 공개된 자리에서 “우리는 미국놈들 발밑에서 신음하는 남조선을 해방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싸웠다. 한민족이 아니라고 하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이냐”라고 허탈감과 불만을 드러냈다.
또 다른 고령의 한 노병 역시 “한국이 아예 완전히 다른 나라라니, 눈 감고 아웅하는 격이 아니냐”는 자조 섞인 비판을 공공연히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문제의 발언을 한 노병들의 가족이 구역당에 불려 가 “처신을 잘 시키라”, “밖에서 괜한 말을 하지 않게 하라”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일종의 상징적 존재인 노병들을 직접처벌하기보다 자식들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자칫 내부 동요를 유발할 수 있는 노병들의 입단속에 나선 것이다.
소식통은 “노병들은 자신들이 직접 느끼는 바를 그대로 이야기한 것뿐인데, 그런 말을 했다고 감옥에 보낼 수는 없으니 괜히 자식들이 불려 가 곤욕을 치른 것”이라며 “노병의 자식들은 또다시 꼬투리가 잡혔다가는 단련대에 끌려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며 부모들이 밖에서 허튼소리를 하고 다니지 못하게 엄포를 놓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북한 당국이 오랜 기간 쌓아온 ‘민족해방’ 서사와 현재의 강경한 ‘적대적 두 국가론’ 사이의 간극으로 내부적으로도 이념적 혼란이 야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일부 노병들은 한국이 같은 민족이 아니라면 상봉 모임 같은 데 계속 불려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며 “오히려 잘됐다”, “홀가분하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는 진심으로 반겨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새로운 대남 노선에 대한 냉소적 반응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소식통은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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