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北 초대 총참모장 강건의 전사(戰死) 사건

김일성이 박헌영, 최용건 등과 함께 강건의 관을 직접 운구하는 장면. 국가기록원은 2007년 8월 9일 서울 정부중앙청사에서 ‘1945~1961, 평양으로의 시간여행’이라는 주제로 시사회를 개최하고 북한 관련 영상기록을 공개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전쟁을 연구할 때 항상 주목을 받는 사건 중 하나는 고위 지휘관의 급사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치 독일의 체코 총독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이나 일본 해군 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비행기 추락 사건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 화학, 생물학, 핵 방어 사령관 이고리 킬리로프 중장의 암살 사건도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6·25전쟁 당시에도 이러한 사건은 있었지만, 예상보다 큰 주목을 끌지 못한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1950년 9월 8일에 발생한 북한군 초대 참모장 강건(1918~1950)의 급사 사건이다. 당시 강건은 소련 대사 테렌티 시트코프, 소련 군사 고문단장 니콜라이 바실리예프, 최고사령관 김일성, 외무상 박헌영, 민족 보위상 최용건과 함께 북한군 지휘 체계에서 중요한 6위 인물이었다. 당시 북한에는 공식적인 장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총참모장의 직위를 ‘12급 지휘관’으로 간주했으며, 그 견장에서 큰 별 두 개를 달고 있어 소련군 중장과 비슷한 계급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강건은 ‘중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강건의 이명은 ‘강신태’였다. 김일성의 만주 항일 빨치산 동지로, 그는 소련에 의해 빨치산 세력의 파괴 후 소련 극동 전선사령부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1942년 7월, 소련 군사 고문단은 제88특별보병여단을 설립했고, 강건은 그 여단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1943년에는 제4대대 대대장 차이스롱(柴世榮)의 간첩 행위로 인해 강건이 후임 대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그의 군사 계급은 대위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강건은 김일성과 함께 ‘붉은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5년 9월에 강건은 조선에 귀국했고, 1948년 2월에는 조선인민군 창건에 참여하여 총참모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그는 인민군의 무장 과정과 1950년 남침 계획 설립의 최종 단계에 참여하였으며, 6월에는 북한 부대에 38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련 대사 시트코프의 기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강건은 인민군의 완전 승리를 확신했다. 서울이 함락된 며칠 후, 7월 3일에는 소련이 전선사령부를 설립하고 강건을 전선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이에 강건은 평양에서 전선으로 이동하여 전쟁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소련 자료에는 강건이 소련 고문관들에게 군을 지휘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하며 도움을 요청한 기록도 있다. 그가 남긴 말 중에는 “고문관들 없이 군대를 지휘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도 있다. 그러나 소련 당국은 고문관들을 38선 남쪽 지역에 파견하는 것에 반대했고, 서울에 있던 강건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선의 상황은 변화했다. 인천상륙작전 전에도 북한군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필자가 보유한 소련 자료에서 강건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다음과 같다.

문일은 김일성이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그를 호출하여 매우 흥분된 상태로 그가 전선의 참모장 강건으로부터 아주 심각한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메시지에서 강건은 적군이 지속적인 대규모 폭격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폭격은 전선의 모든 부대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적군은 30~40대의 비행기들로 여러 그룹을 만들어 병력에 상자들을 투하하는데, 상자는 공중에서 열리며 그 안에서 많은 소형 폭탄들이 쏟아진다고 했다. 이런 폭격으로 인해 군대는 인명 피해와 함께 기계 장비도 큰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공습 결과로 1950818, 4사단에는 거의 남은 병력이 없으며, 사단 본부는 파괴되고 사단장이 전사했다고 전해졌다.

강건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1950년 9월 8일, 김일성 내각이 설립된 지 정확히 2년이 지난 후, 그는 사망했다. 9월 11일, 북한 노동신문과 소련의 프라우다는 강건의 부고를 전했지만, 사망지와 사망 원인은 공개되지 않아 수십 년 동안 이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장의위원회는 박헌영, 최용건, 허가이, 김달현, 박일우, 홍기주, 최경덕, 박정애, 한설야, 남일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이 중 최용건과 남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후에 숙청당했다. 1957년에 최용건은 차수 계급을 박탈당했고, 남일은 1976년에 의심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50년 당시 남한 매체는 강건의 사망에 대해 보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 대한민국의 실효 지배 구역은 낙동강 방어선 내에 있었고, 중앙 신문들은 북한의 상황을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발행된 부산일보에서도 ‘적군 총참모장’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강건의 사망 사건은 1990년에야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북한 초대 총참모장의 마지막 순간들을 목격했던 유성철 전 북한군 작전국장은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강건의 사망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한 인민군은 그 여세를 몰아 720일 대전을 함락시켰다. 그래서 서울 중앙청의 전선사령부도 대전 북방에 있는 한 산골 사찰로 옮겨갔다(절 이름이나 위치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나는 강건 총참모장과 함께 인민군 후속부대의 금강 도하작전을 시찰나갔다가 또 한 번 위기의 순간을 맞았다. 강건 총참모장과 나는 어느 전투부대를 시찰한 뒤 금강 옆 도로를 따라 다른 부대로 이동했다. 지프를 타고 가면서 나는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혼돈 속에서도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푸른 강물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바로 내 앞에 가던 강건 총참모장의 지프가 고막을 때리는 폭발음과 함께 길옆으로 곤두박질했다. 국방군이 후퇴하면서 깔아놓은 지뢰를 밟은 것이다. 강건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강건의 시신을 수습, 전선사령부로 돌아온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우선 최고지휘관의 공백 사태를 신속히 수습해야 했다. 그래서 먼저 강건의 사망 소식을 상부에 보고하고 인민군의 동요를 막기 위해 이를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북한 당국은 강건의 사망 배경에 대해 공개한 적이 없다. 김정일 시대에 발간된 조선대백과사전에서는 그의 사망 배경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현재 인터넷에서는 강건의 사망 장소가 ‘경상북도 안동시’로 나와 있지만,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도 논산시와 강경읍을 거쳐 다시 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며 군산만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안동 사망설의 출처를 추적해 보니, 1970년 창작과 비평(2호)이라는 잡지에 실린 강용준 작가의 ‘광인일기’라는 소설이 그 근원으로 보인다. 이 잡지의 제160페이지에는 ‘독전차(督戰次) 나왔던 괴뢰군 참모장 강건이 안동 부근에서 지뢰 사고로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는 아마도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내용으로, 누군가 이를 사실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안동군은 낙동강 방어선 근처에 위치해 있어 그 진위에 신뢰를 갖게 만들었을 수 있다.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에서도 이 부분이 인용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잘못된 정보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실제로 강건의 사망지는 안동시보다 서쪽에 있었다. 강건을 죽인 지뢰를 설치한 국군 병사는 예기치 않게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참수 작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병사의 이름이나 부대, 정확한 사망 위치는 아마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위치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6·25 전쟁이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전쟁에 관련된 많은 미스터리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무명전사의 전쟁’이라는 별칭을 가진 채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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