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까지 구소련 공화국 중 하나였던 키르기스스탄.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보다 빠르게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민주화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아직도 지방 도시를 다니다 보면 구소련 시기에 협동농장이나 공동급식소로 쓰였던 건물들이 폐허로 남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국가 소유였던 많은 건물과 토지는 지방 정부 소유가 됐으나 주민들도, 지방 정부도 공유지에 새로운 시설로 건립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금도 문제였지만 정부의 땅을 주민의 필요에 따라 자치적으로 활용해 본 경험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폐허로 남아 있던 공적 부지가 주민의 필요를 담은 공간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있다.
외교부 공동취재단은 지난 11일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 오쉬시로부터 34km 떨어진 아라반군 유스포바면 숫콜 마을을 찾았다. 이곳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의 도움으로 설립된 ‘칼타주 에네’라는 이름의 유치원이 있다. 유치원 부지는 구소련 시대 공동급식소가 있던 자리로 유치원이 들어서기 전까지 30년 넘게 폐허로 있던 곳이다.
숫콜 마을은 구소련 시대 협동농장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도 많은 주민이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다. 110가구 750명의 주민이 살고 있지만 과거 유치원이 없어 여성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보육에만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려면 5km 거리의 아그라놈이라는 옆 마을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에 유치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숫콜 마을 주민들은 10년 전부터 건립을 시도했으나 재원 부족으로 번번이 좌절됐다.
숫콜 마을 주민들이 염원했던 유치원 건립은 코이카의 ‘새마을 기반 지역개발 시범사업’으로 마침내 현실화됐다. 시범사업 선정 후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코이카가 유치원 건립 비용으로 2만 5000달러를 지원하자 이것이 마중물이 돼 면(面) 정부에서도 3만 5000달러를 부담했고 여기에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4000달러를 모금했다.
사업 수행기관인 굿네이버스의 전홍수 키르기스스탄 지부장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사결정과 참여가 지속적인 마을 개발과 관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이곳 유치원에는 57명의 아이들이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보육 서비스를 받고 있고 교사, 조리사, 간호사 등 17명이 일자리를 얻어 소득을 창출하고 있다.
나시리딘 압디라우이모프(Nasiridin Abdirayimov) 유스포바면 면장은 “부모님들이 자유시간이 생기니 다른 데서 일을 할 수 있게 돼 수익이 증가했다”며 “한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이러한 좋은 경험을 잘 활용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업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숫콜 마을은 또 코이카의 ‘새마을 기반 지역개발 시범사업’ 2단계로 과거 협동농장이 있던 자리에 이 지역 최초로 비닐하우스 농업을 시작했다. 이 지역은 한겨울 체감온도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노지 채소 농사가 잘되지 않아 겨울이면 채솟값이 3~4배가량 뛰곤 한다. 그런데 코이카의 지원으로 지난겨울 비닐하우스에서 오이와 토마토 재배를 시도하면서 겨울에도 지속해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됐다.
압살롬 키르지스바에브(Absalom Kirgizbaev) 마을 프로젝트 리더는 “비닐하우스 농업을 시작하면서 1년에 1모작만 하던 것을 2모작까지 할 수 있게 됐다”며 “단순히 비닐하우스만 지어주는 게 아니라 재배 교육도 시켜주고, 우리들이 사업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확인해준 코이카와 굿네이버스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지윤근 코이카 키르기스스탄사무소 부소장은 “농촌 지역에 대한 지원 사업은 우선 1단계에서 지역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기초 인프라 부분을 지원하고 2단계에서는 이를 토대로 소득 증대를 이끌어내는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자발적인 참여로 주민들의 삶이 지속적으로 개선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쉬시 카라쿨차면 사리-카무쉬(Sary-Kamysh) 마을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코아키의 지원으로 도서관, 학교식당, 다목적 여성센터 등 기초 인프라 마련과 금융, 젠더 교육 등 다양한 사업이 이뤄진 곳이다. 코이카는 이 지역에서 민간 NGO 굿네이버스와의 협력으로 ‘통합적 농촌개발 사업’을 진행했다.
250가구 954명의 주민으로 구성된 사리-카무쉬 마을은 100% 키르기스인으로 구성된 씨족 마을로 주민 간 협동을 의미하는 ‘아샤르’라는 전통 문화를 중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코이카는 이 마을 기초 인프라 사업에 2만 5000달러를 지원했다. 주민들은 자치 회의를 통해 이 지원금을 도서관과 학교 식당 건립을 위해 사용할 것을 결정했고 부족한 재원을 채우기 위해 면·군·시 정부에서 운영하는 펀드를 찾아 지원을 요청하고 총 11만 5000달러의 기금을 마련했다.
주민 자치 회의를 통해 마을에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자발적으로 예산을 확보, 운영해본 경험이 지속적인 지역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바엣 볼롯(Baetov Bolot·56세·남) 사리-카무쉬 마을개발위원회 리더는 “마을에 여러 국제 기구들이 지원을 한 바 있지만 대부분 단기 프로젝트에 지원금을 주고 사업이 완료되면 나간다”며 “하지만 코이카는 기간이 길고 통합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지속 가능한 개발 사업이 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원 사업을 통해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며 “한국 국민들과 윤석열 대통령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사리-카무쉬 마을은 코이카의 통합적 농촌개발사업 지원 지역 중에서도 자발적 참여로 지속적 개발에 대한 성과를 이끌어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종수 코이카 키르기스스탄사무소 소장은 “지속적인 발전에 초점을 두는 코이카의 개발 협력이 한국에 대한 신뢰로도 이어지고 있다”며 “2021년 키르기스스탄이 우리 정부의 중점협력국으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사업 분야가 발굴·확장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