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뒤에서 눈물흘렸다는 ‘이 노래’에 간부들은 “소름 끼친다”

[북한 비화] '생이란 무엇인가' 두고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간부들은 '심화조 사건' 떠올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16일 아버지인 김정일 생일(광명성절로 선전) 기념 음악회에서 같은 곡을 두 번이나 앵콜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지난해 2월 16일 북한 매체를 통해 공개된 1시간 50분 50초짜리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기념음악회’ 공연 영상에는 김정은이 같은 곡을 두 번이나 앵콜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평양 만수대예술극장에서 진행된 이 공연에서 김정은은 공연 시작 45분쯤 다음 곡을 준비하는 무대를 향해 오른손 검지를 허공에 휘저으며 뭔가를 지시한다. 그러자 지휘자가 당황한 듯 악단에 반주를 주문하고, 악단은 직전에 연주했던 곡을 재차 연주하기 시작한다.

김정은의 앵콜곡은 김옥주 등 북한 여가수와 인민군 공훈합창단이 함께 부른 가요 ‘친근한 이름’이었다. 이 곡은 ‘노래하자 김정일 우리의 지도자, 자랑하자 김정일 친근한 이름’이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김정일 찬양 가요다.

앵콜곡이 연주되자 김정은은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며 활짝 웃는 얼굴로 오른편에 앉은 리설주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김정은은 공연이 모두 끝난 뒤에도 다시 같은 곡을 앵콜한다. 출연진 모두가 무대에 나와 관객석을 향해 인사하고, 관람석에 앉았던 청중도 박수로 화답하며 공연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에서다. 김정은은 또 손가락을 허공에 휘저으며 뭔가 신호를 준다. 다시 한 번 곡을 연주하라는 지시다.

지휘자의 신호에 맞춰 ‘친근한 이름’ 반주가 흘러나오자 즉석에서 가수 김옥주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한 번도 아닌 두 번을 연이어 노래를 부른다. 김정은은 이에 만족한 듯 노래가 끝난 뒤 엄지를 치켜세운다.

당시 공연을 직접 관람했거나 텔레비전으로 영상을 시청한 주민들은 한결같이 ‘1호 행사에서는 누구도 감히 재청할 수 없고 정중한 분위기에서 관람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공연에서는 원수님(김정은)께서 몸소 재청을 지시하고 같은 곡이 세 번이나 연주됐다. 이것이 편집 없이 그대로 방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영상이 공개된 후 한국에서는 김정은의 앵콜곡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북한 내에서는 김정은이 이날 공연에서 ‘생이란 무엇인가’를 따라부른 것에 더 큰 반향이 일었다.

북한 가요 ‘생이란 무엇인가’는 조선예술영화 ‘생의 흔적’의 주제곡이다. 이 영화는 평범한 여성 한순희가 열심히 농사일에 몰두하다 숙천군에 현지지도 나온 김일성을 만나고 그 인연으로 협동농장 관리위원장까지 승진한 뒤 마지막에는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 한선희의 남편은 숙천군의 농업 간부로 있다가 지병으로 사망했으나, 영화에서는 그가 한국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묘사됐다. 북한은 한순희가 열심히 농사일에 나선 것을 남한의 해상 도발에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남편의 뜻을 받든 것으로 표현했다.

북한에서는 ‘생의 흔적’이 개봉된 후 큰 인기를 끌자 ‘이어가는 참된 삶’이라는 속편도 나왔다. 이 영화는 ‘고상한 인간애와 노동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사망 전 김정일의 마지막 공개 사진. 오른쪽에 김정은과 장성택이 보인다. /사진=노동신문

김정은은 지난해 광명성절 기념 공연이 끝난 뒤 만수대예술극장 1호 대기실에서 관계 부문의 중앙당 일꾼들과 담화를 나눴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생이란 무엇인가’ 노래 가사를 들으면 들을수록 한 나라 영도자라기보다는 평범한 인간으로 불같이 자신을 태우시며 선군 장정의 길, 인민을 위한 길을 가시다가 현지지도의 길에서 생을 마감하신 장군님(김정일)에 대한 생각과 추억에 잠겨 격정을 금할 수 없다”며 눈물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특히 그는 “장군님께서 생전에 ‘생이란 무엇인가’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며 “이 노래는 진정한 애국자란 명예와 보수를 바라지 않고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주시기도 한 영화의 주제곡”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담화 내용이 전해지면서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는 1997년 한순희 총살 사건이 다시 입에 오르내렸다. 김정은은 한순희를 주인공으로 한 ‘생의 흔적’의 주제곡 ‘생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며 아버지 김정일을 떠올렸으나, 간부들은 숙청의 피바람이 불었던 끔찍한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영화 ‘생의 흔적’의 실제 주인공인 한순희는 소위 ‘심화조 사건’(1990년대 후반 김정일의 지시로 진행된 대규모 간첩 색출 사건)에 연루된 당시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가 간첩죄로 처형당할 때 그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함께 간첩죄가 씌워져 1997년 9월 통일거리 승리3동에서 숱한 평양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관히와 함께 공개총살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0년 처형된 한순희는 김정일의 지시로 명예가 회복됐다. 이 과정에서 그 가족들도 신원이 회복됐지만,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가족 대부분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실제 간부들은 “노래 ‘생이란 무엇인가’하면 심화조 사건이 떠올라 소름 끼치고 그 사건의 많은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면서 “수령님, 장군님, 원수님 한 마디면 숙청 당하고, 관리소 끌려가고, 추방되는 우리나라(북한)에서는 좋은 노래에도 아픈 상처가 깃들어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