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말하는 비핵화는 결코 ‘북한 비핵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김일성 시대부터 주장해 온 ‘미국의 핵우산이 철거되고 주한 미군이 철수한 한반도’를 상정한 ‘조선반도(한반도) 비핵지대화론’의 연장이다.
김정은, ‘북한 비핵화’ 용어 일체 불(不)사용
김정은은 집권 이후 단 한 차례도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거나 공식 매체, 합의서 등에 명기한 일이 없다. 오로지 핵개발의 당위성과 권리를 강조하면서 ‘비핵화’나 ‘한반도 비핵화’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평화를 지향한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가운데 협상에서 등가적 상호조치를 요구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전술적 행동이다. 이것은 2016년 5월 7차 당대회가 종료된 직후 발표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5대 조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 ① 남한 내 미국 핵무기 공개 ② 남한 내 모든 핵기지 철폐 및 검증 ③ 미국 핵타격 수단(전략폭격기)의 한반도 전개 금지 보장 ④ 대북한 핵무기 사용 및 위협금지 약속 ⑤ 주한미군 철수 (2016년 7월 6일 공화국 대변인 성명, 조선중앙통신)
이후 북한은 남북 및 미북 간 합의문에 이를 관철시켜 나가고 있다. 즉, 조항에 ‘한반도 비핵화’로 표기하고, 다른 사항들이 이행될 경우 시행하는 조건부(후순위 배치)로 되어 있으며, ‘이행한다’가 아니라 ‘노력한다’로 명기되어 있다. 이것은 2005년 9월 베이징에서 6자회담 참가국이 합의한 9·19 베이징 공동선언이 첫 조항에 ‘북한핵 폐기’를 확실하게 명기한 것과 큰 차이가 난다.
4·27남북정상회담 합의문(2018) 제3조: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한반도 비핵화 노력) / 6·12미북정상회담 합의문(2018) 제3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노력 / 9·19남북정상회담 합의문(2018) 제5조: 한반도 비핵화 노력 ↔ 9·19베이징공동선언(2005) 제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과 조속한 시일 내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
비핵화 협상 기간에도 핵전력 지속 강화
북한이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미국의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핵·미사일 전력 강화를 중단하지 않은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김정은이 2018년 4월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에게 “내 아이들이 핵을 지닌 채 평생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 핵과 미국의 핵우산이 함께 철폐된 한반도’, 즉 미군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한반도를 상정한 발언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 같은 저의는 2018년 12월 20일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것은 북과 남의 영역 안에서뿐 아니라 조선반도를 겨냥하고 있는 주변으로부터의 모든 핵위협 요인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조선반도 비핵화란 우리의 핵억제력을 없애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의이다”를 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남북한의 비핵화 개념에 대한 동상이몽
대한민국은 이미 1991년 11월 주한미군의 전술핵을 모두 철수시킨 후 “단 한 개의 핵무기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 핵만 폐기하면 한반도 비핵화는 달성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북한은 다르다. “조선(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미 합동군사훈련 영구 중단, 미국의 핵우산 철폐, 주한 미군 철수로 귀결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김정은의 속셈은 한국과 미국이 들어 줄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협상 과정에서 핵도 갖고 경제·외교적 실리도 챙기려는 ‘꿩 먹고 알 먹기’ 위한 전략전술이다.
김정은은 올해 들어서는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8차 당대회를 소집하고 ‘핵을 기초한 무력적화통일 노선’을 당규약에 명문화했다.
“개정된 당규약에서는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과업 부분에 강력한 국방력으로 근원적인 군사적 위협들을 제압하여 조선반도의 안정과 평화적 환경을 수호한다는 데 대하여 명백히 밝히였다. 이것은 강위력한 국방력에 의거하여 조선반도의 영원한 평화적 안정을 보장하고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앞당기려는 우리 당의 확고부동한 입장의 반영으로 된다” (조선중앙통신, 2021.1.10)
“국력향상의 징표의 하나인 부단히 증가되는 국가 방위력도 분단과 전쟁의 원흉인 외세의 최후발악을 봉쇄하고 조선반도의 평화를 보장하며 통일을 앞당기는 현실적인 힘이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2021.6.7)
이는 핵무기 개발이 9부 능선을 넘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비핵화 협상은 없다. 핵군축 협상만이 있을 뿐이다. 대결 국면이 격화될 경우에는 무력도발도 서슴지 않겠다”는 점을 노골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정은은 (1) 비핵화 발언을 통해 역으로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공식화한 가운데 (2) 핵·미사일을 더욱 고도화·대량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 (3) 향후 협상을 조건부 군축협상으로 진행함으로써 핵을 어떻게 해서라도 보유하려는 고도의 전략전술, 즉 파키스탄식 핵보유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 파키스탄식 핵보유 모델: 파키스탄은 1988년 첫 핵실험 이후 총 6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하여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의 반테러 전쟁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하면서 핵보유를 사실상 묵인받았다. 국제사회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하에서 파키스탄을 공식적으로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문제 삼아 제재를 가하지도 않는 상황, 즉 ‘사실상의 핵보유국 모델’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의 ‘한반도 비핵화론’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국가안보실장 재직시부터 ‘한반도 비핵화’ 용어를 사용해 왔으며, 급기야 2021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바이든 정부를 설득하여 공동성명에 ‘북한 비핵화’ 대신 ‘한반도 비핵화’ 문구 명기를 관철시켰다. 이후 기자회견과 국회 질의 답변 등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는 이미 1992년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부터 사용해 오고 있는 개념이다” “남북한 사이 한반도 비핵화론에 차이가 없다” “북한의 비핵지대화론은 사실상 소멸된 개념이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자구 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외교관, 특히 국가 외교를 책임지고 있는 수장으로서 적확한 태도가 아니다. 북한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비핵화’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는 용어 혼란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데 북한의 전략전술에 말려든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정 장관이 주장하는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남북이 공동으로 사용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조에 나와 있는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여덟 가지 개념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남북한 영토 내의 모든 핵무기와 핵제조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고 향후에도 보유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미국의 핵확장억제력 제공, 주한미군 주둔과 같은 핵우산 문제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상관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우리는 그동안 북측에도 분명히 얘기했고, 북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 이후 비핵지대화라는 말을 한 번도 쓴 적이 없다”(이상 5.28자 오마이뉴스와 5.29자 중앙일보 인용 요약).
정 장관의 말대로라면 좋겠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의 발언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팩트가 틀리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외교에서 금기시하는 소망성 사고(wishful thinking)의 기미마저 보인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의 주장에 대한 반론
정 장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노태우 대통령이 미군의 전술핵 철수를 완료한 후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는 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을 전제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8가지) 중지를 명기한 선언이었다. 즉, 공식 표현만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었지, 남한에는 이미 핵무기가 한 개도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북한 비핵화’를 규정한 선언이었다. 북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사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198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사회주의권 몰락이라는 쓰나미 국면이 지나자, 북한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국제사회의 경고와 제재를 뿌리치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지금은 사실상의 핵보유국 대열에 올라섰다.
다시 말해서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굴욕적 문서’(위기 회피용)이며, 이미 고의적으로 사문화시킨 문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은 고목나무같이 효력이 다한 문서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1992년 당시는 북한이 체제위기 상황 하에서 핵무기 개발을 모색하는 시기(남북한 핵무기 보유수 0 대 0)였고, 2021년 현재는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어 최소한 0 대 50의 국면이다. 모든 게 180도 바뀌었다. 정 장관의 상황 인식이 너무나 안이하다.
둘째, “미국의 핵우산과 주한 미군의 주둔은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이 없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고, 북한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앞에 구체적으로 내용을 적시한 2016년 7월 6일의 ‘비핵화 5대 원칙’ 성명과 2018년 12월 18일의 조선중앙통신 보도 등 북한의 공식 문건에서 ‘미국의 핵우산 철거와 주한미군 철수’를 비핵화의 선행조건으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상치되기 때문이다.
셋째, 특히 “북한에게 이런 사실을 충분히 얘기했고, 북한도 이해하고 있다”는 발언은 위에서 언급한 사실은 물론이고 김정은이 지난 8차 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를 근본문제라고 주장하는 등의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신빙성이 높지 않다.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 성사와 비핵화 협상의 가시적 성과 도출을 위해 김정은에게 에둘러 이야기하고, 그의 반응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정부는 북한에게 ‘비핵화 개념’부터 당당하게 확인해야
마지막으로, 정부(정의용 장관)에 당부한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가 맞다고 강변하고 있고, 북한을 회담 테이블로 다시 불러내기 위해 미국까지 설득하여 공동성명서에까지 명기했으니 용어 사용의 철회까지는 요구하지 않겠다. 그러나 북한이 전통적으로 용어혼란 전술을 중요한 대남혁명 전술로 구사해 오고 있는 데다가, 비핵화의 대상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항이기 때문에, 향후 대북 협상을 전후로 북한에게 다음 사항을 꼭 확인해 주길 당부한다.
“너희가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가 미국의 핵우산이 철거되고 주한 미군이 철수되는 상황까지를 가정한 것이냐, 아니냐?”
※ 본 정론은 『김정은과 바이든의 핵시계 –알기 쉽게 풀어쓴 ‘자유 대한민국’ 전략노트』 (곽길섭 저/2021.7.15 기파랑)에서 관련내용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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