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남겨진 전쟁포로들의 비참한 삶…후손은 ‘꽃제비’로 전락

[북한 비화] 여전히 짐승 취급 당하는 전쟁포로와 그 가족들…배고픔, 감시, 차별로 고통

북한 양강도 혜산시 근처에서 폐품을 줍고 있는 꽃제비의 모습. /사진=데일리NK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인민군에 포로로 잡힌 최 모 씨는 2005년 사망 시까지 꼬박 54년을 북한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그의 아들은 최 씨가 일하던 함경북도 아오지탄광에서 대를 이어 탄을 캐다 5년 전 사망했고, 남겨진 그의 친손주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병사(病死)로 일찍 여의고 지금껏 꽃제비로 방랑 중이다.

경상북도가 고향인 최 씨는 18살 되던 해인 1950년 국군에 징집돼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1년 만에 북한군에 포로로 잡혀 왔다. 포로수용소는 평안남도 강동군에 있었는데 당시 북한은 포로들을 가둬 감시하는 한편,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3주간의 혹독한 징벌을 내리거나 다른 포로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기도 했다.

최 씨는 이후 강동 포로수용소에서 수천㎞ 떨어진 아오지탄광에 탄부로 배치받아 강제노역을 치렀다. 최 씨와 같은 처지에 있던 국군포로들은 남한과 전쟁포로 교환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해 그저 짐승처럼 일만 해왔다.

당시 북한은 최 씨를 비롯한 국군포로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강제로 여성들과 결혼시켰다. 가족이 생기면 선뜻 도망칠 생각을 못 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국군포로들과 강제 결혼한 여성들은 북한에서 계급적 토대나 출신성분, 사회성분이 나쁜 집안의 이들로, 이에 포로 가족의 자녀들은 대대손손 북한의 억압과 통제 속에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죽지 못해 살아갔다.

최 씨는 2000년대 초반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머금었다. 당연히 국군포로 송환 문제가 논의될 것이라 기대를 품었으나 감감무소식이었고, 집으로 돌아온 최 씨는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을 조국이 이렇게 쉽게 잊어버릴 수 있냐”며 바닥을 치고 통곡했다고 한다.

북한은 아오지탄광에서 일하는 최 씨와 그 아들을 두고 “저들 부자(父子)는 포로가족 놈팡이들이니 단단히 일 시키고 감시해라”라며 혹독하게 대했다. 이들에게는 탄광 공급규정에 따른 배급도 정량의 절반만 주고 작업복, 안전모와 같은 물자도 차별 공급됐다.

심지어 탄광 당위원회는 “포로가족은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면서 등살이 휠 때까지 대대손손 일해도 우리 공화국에 지은 죄를 다 못 갚을 계급적 원쑤(원수)”라고 교양했다. 그렇게 최 씨 가족은 배고픔과 감시, 사회적 차별로 인한 정신적 고통 아래 살다 죽어갔다.

최 씨의 아들도 험한 갱에서 일하다 사고로 2016년 사망했는데, 그해 아오지탄광에서는 당정책을 비난하고 국가를 모독했다는 죄로 국군포로 후손 20대 청년 17명을 한날한시에 탄광 앞마당에서 공개재판하고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지난 2005년 사망하기 직전 최 씨는 “나는 이제는 틀렸다. 그러나 너희들이라도 한국에서 국군포로를 찾는 사업이 시작되면 참전 당시 나의 소속과 계급, 군번을 기억하고 있다가 우리가 여기에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려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여기까지가 현재 꽃제비로 방랑 중인 국군포로 후손 최 군의 증언이다. 그는 자다 깨워도 줄줄 외울 수 있을 만큼 할아버지의 소속과 계급, 군번을 뇌리에 깊이 박아두고 북한에 남겨진 국군포로와 그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증언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