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北, 南 민간인 사살에 망설임 없었다

25일 오전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 인근 해상에 정박한 실종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에서 해경선으로 보이는 선박 관계자들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

북한이 남한의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 이 모 씨를 해상에서 사살하고 시신까지 불태운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씨가 북한 해역으로 들어간 경위가 어떠하든 비무장 상태였고, 이 씨의 신병을 북한이 완전히 확보하고 있어 급박하게 이 씨를 죽여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이런 예민한 대응은 지난 7월 탈북민 김 모씨가 강화도를 통해 개성으로 월북한 사건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당시 북한에서는 월북자 김 씨가 코로나19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비상이 걸렸고, 김정은 위원장이 정치국 비상확대회의를 소집해 개성시를 통째로 봉쇄하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해상경계를 소홀히 한 북한군 부대에는 엄한 처벌이 내려졌다.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위원장이 “해당 지역 전연부대의 허술한 전선경계근무실태를 엄중히 지적하고 당중앙군사위원회가 사건발생에 책임이 있는 부대에 대한 집중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엄중한 처벌을 적용하며 해당한 대책을 강구할 데 대하여 토의”했다고 전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재한 당 정치국 비상확대회의(7월 25일)에서 최대방역체제로 전환과 관련한 결정서가 채택됐다. /사진=노동신문·뉴스1

 

북한의 인명경시 풍조 여실히 드러나

불과 2개월 전 경계실패로 뜨거운 맛을 본 북한군 부대인 만큼, 이번 외부 침입자에 대해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코로나19의 유입을 막기 위해 북중 접경지대에 무단 접근자에 대해서는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질 정도로 전반적인 경계가 강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신병을 확보하고 6시간에 걸쳐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조사까지 마친 상태에서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높아진 긴장 속 경계강화’라는 조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람 목숨이 귀중하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이런 행위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북한의 인명경시 풍조가 여실히 드러난다. 북한에서 이른바 백두혈통, 김정은 일가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귀중한 존재지만, 다른 사람들은 재판 절차도 없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들이다. 돈 없고 빽 없는 일반 주민들은 물론이고, 당 간부 정도 되는 고위직들도 숙청의 칼날 앞에서는 고사총에 시체도 남지 않은 채 죽을 수 있는 가련한 존재들이다. 정치범수용소에 수 많은 사람들을 가둬놓고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것도 사람 목숨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북한 지도부는 이 씨를 배에 태워 육지로 옮긴 뒤 조사실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코로나 감염 가능성을 감수하기보다, 해상에서 처리하는 게 낫다는 극히 반인륜적이고 인명을 경시하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남한을 완전히 무시한 것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볼 부분이 있다. 북한 정권의 인명경시 풍조를 전제한다 하더라도, 북한이 이번에 사살한 사람은 북한 주민이 아니라 남한 주민이라는 점이다. 남북이 헌법상으로는 한 나라라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두 나라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다른 나라(헌법상의 의미로 쓴 것이 아니다)의 국민을 자의적으로 죽인다는 것은 상대 측과의 상당한 분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행위다. 어떤 국가도 타국의 국민을 함부로 해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북한은 남한 민간인을 불과 6시간 만에 살해했다. 그 과정에서 남한의 의사를 타진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었다. 일선 군부대에서 상부에 보고하고, 상부에서 사살 결정이 하달되자 일체의 망설임 없이 남한 민간인을 죽였다. 이는 북한이 남한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오전 경기도 이천시 육군 특수전사령부에서 열린 제72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

전략적 대응 강조하는 정부, 정말 전략적인가

청와대는 북한에 대한 단호한 대응의지를 밝히면서도 “남북관계는 지속되고 견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당장의 국민 정서에는 맞지 않을 수 있지만, 남북관계는 보다 긴 전략적 안목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정부가 개별사건 하나하나에 휘둘리기보다 전략적 대응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정부의 대응이 과연 전략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남한을 이렇게까지 무시하고 있는 것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결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알다시피 어떤 경우라도 남북관계의 개선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북한이 남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남북관계 개선을 추구하며 북한의 호의를 기대하는 것이 북한에게 카드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아무리 무시해도 언제든 손만 내밀면 써먹을 수 있는 남한이라는 카드는 북한 입장에서 진지하게 고려할 변수가 못 된다.

현 정부로서는 2018년의 연이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생각할 때 남은 임기 안에 다시 한번 대화의 르네상스를 꽃피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남은 임기 안에 무엇인가를 이뤄내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는 대북정책은 원한다고 해서 성과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대북정책은 어느 한 정부의 임기 내에 성과가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화가 이뤄지고 남북관계가 개선된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절대 명제가 될 수는 없다. 대화가 가능할 때는 해야 되겠지만, 자신의 임기 안에 무엇인가를 이뤄야 한다는 조바심에 북한의 호의만 기대하고 있을 경우 북한의 무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