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시대 강도 높은 검열을 통해 조직지도부, 국가보위성 등 권력 핵심층조차도 해임·철직 및 혁명화 등의 칼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여기에서 벗어나 각종 특권을 누리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일단 데일리NK 내부 소식통들은 ‘백두산건축연구원(평양시 중구역 소재)’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건축 부흥의 새 역사를 쓰고 싶은 김정은의 야심을 실현하는 데 있어 이 연구원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즉, 건축을 매개로 인민의 어버이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김정은의 든든한 ‘두뇌’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백두산건축연구원’은 김일성 시대엔 이른바 소규모 설계사무소로 출발했다. 1952년 평양시 전후복구건설 총계획도안을 작성해 김일성에 비준받아 집행하면서 첫발을 내딛게 됐다. 그러다 1982년 도시설계, 건축설계, 건재구성 중심 설계·연구하는 기관으로 확장됐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차 평양의 혁신적 변신이 절실했던 김정일은 이곳을 백두산건축연구원이라고 명명하면서 중추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이때 바로 5월1일경기장, 평양국제영화회관, 평양교예극장, 평양국제통신센터, 양강호텔, 청년호텔, 광복거리(평양시 만경대구역), 체육인촌(양각도) 등 주요 건축물 설계에 나서게 된 것이다.
또한 이후 당 창건기념탑, 송도원 국제소년단 야영소, 조선인민군 4·25예술영화촬영소, 조선콤퓨터센터, 김만유병원, 양각도국제호텔, 만수대예술극장, 인민대학습당, 창광원 등의 설계도 담당했었다.
아울러 연구원에서는 현대적인 건축물뿐 아니라 지금까지 380여 개에 달하는 중요 대상 설계를 완성했고, 100여 종에 달하는 공기조화기계열장치 공간설계와 판식 열교환기, 대형노출식 및 은폐식 냉온풍기, 냉각탑 등 120여 건의 설계도 완성했다.
이처럼 김정일 시대에 이미 명실공히 건축설계분야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연구원은 김정은 시대 들어 현대판 건축연구기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김정은이 이곳에 오토캐드(AutoCAD), 3D 맥스(3Ds-Max), 스캐치업(Sketch-up) 등 다양한 건축설계 프로그램들을 도입했던 것이다.
특히 김정은은 인재 발굴에도 공을 들였다. 평양건축종합대학 졸업생과 건축 및 실내환경디자이너들, 코딩설계 부문 수재들을 우선 선발한 시스템을 갖출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지방 출신도 이곳에 배치되면 평양시 거주가 확실해질 정도로 김정은의 애정을 한몸에 받게 됐다.
김정일 시대 문화·예술 분야 가문이 특혜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과학·건축 분야로 그 축이 옮겨가는 추세라는 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강원도)와 삼지연 건설(양강도)에서도 자재 부족으로 건설작업이 지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우대는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소식통은 “백두산건축연구원 내부에 자체 경리과가 존재할 정도로 공급은 체계화되어 있다”고 실제 상황을 소개했다.
이어 그는 “평양 시민들에게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을 때에도 이곳에는 1인 기준 월(月)에 쌀 약 21kg(1일 기준 700g), 밀가루 5kg, 기름 2kg, 닭알(계란) 2판(총 60알), 돼지고기 5kg, 수산물 20kg를 지속적으로 정상 배급해왔다”면서 “특히 새로운 건축물 설계도가 완성될 때마다 우대물자가 쏟아졌는데, 이를 내다 팔 정도로 그 양이 엄청났다”고 실상을 전했다.
*소식통이 전한 현재 백두산건축연구소 상황=내부 인원은 전문설계사와 연구사, 보조설계사 및 조수들로 구성되어 있고, 총 200명 정도다. 그들 대다수는 ‘김일성상’계관인, 노력영웅, 인민설계가, 공훈설계가, 공훈과학자, 교수, 박사, 부교수, 학사 등 명예칭호와 학위학직을 소유하고 있다.
조직은 전문분야에 따라 실(室)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건재연구소 건축재료연구실(총 4실), 건축과학이론연구실(총 3실), 건축설계연구실(총 5실), 건축공학연구 공학실(총 4실), 건축정보센터실(총 4실) 외에 건물설계실, 구조물 설계실, 전기시설물 설계실, 력학설계실, 환경위생 설계실, 건재 설계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