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밖 북한] ‘복받은 미래’를 보며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

/사진=강동완 동아대 교수 제공

2019년 북한에서 발간한 <복받은 미래>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집이 있다. 이 책에는 17편의 단편소설이 실렸는데 천편일률적으로 김정은의 성과를 자랑하고 선전하는 내용이다.

그 중 <싼드라의 편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유독 눈길을 끈다. 소설의 형식은 “은옥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김정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를 김정은이 직접 읽는” 설정이다. 주인공 은옥은 조선소년단 제8차대회 때 김정은에게 꽃다발을 전했던 아이로 소개된다. 그 아이가 송도원국제야영소에서 <수리아(시리아)에서 온 국제소년단야영생>들과 함께 겪는 이야기를 편지로 전한다.

이 편지에서 은옥은 송도원국제야영소에 대해 “곳곳마다 아버지 원수님의 사랑이 속속들이 깃들어 있는 별세상과도 같은 이곳에서 제가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수리아에서 온 외국인 소녀가 자기도 우리들처럼 원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고 한 심장의 토로입니다”라고 표현한다. 소설에서 송도원야영소는 “별세상”, “에덴동산에 비교할 수 없는 지상낙원”으로 선전한다. 그리고 수리아에서 온 산드라(이 소설의 제목) 역시 자신의 부모님께 전하는 편지에서 송도원국제야영소를 자랑하고 김정은의 은혜를 선전한다.

<복받은 미래>라는 책 제목과 같이 북녘의 아이들은 진정으로 지상낙원에서 복 받은 미래를 누리고 있을까라는 상념에 잠기다 문득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

2019년 9월 19일을 지나는 한국 사회는 지금 어떤 미래를 가고 있을까? 9.19판문점 선언 1주년을 자축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 1년 동안 한반도에 평화가 도래했다고, 군사분야에서 긴장이 크게 완화되었다며 자축하는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지금 이 시기에 누가 한반도의 평화를 말할 수 있는가. 저들에게 평화란 대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한반도에는 남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가? 진정 평화를 말할 만큼 북한인권 상황이 개선되었는지, 반쪽 조국에 살고있는 우리의 삶이 평화를 말할 만큼 안정되었는가.

분단된 나라의 통일부 수장은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신념 따위는 내팽개친 지 오래다. 자기 자식들은 미국에 유학 보내 더 나은 미래를 만들라 하면서, 북녘의 자녀들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인사청문회 때 비굴하기 짝이 없었던 그 행태를 보며 이미 예견했지만, 취임 이후 고작 한 일이라고는 온갖 행사에 다니며 평화로운 한반도라 외치는 축사를 읽는 정도였다.

추석날 이산가족 상봉을 하지 못한 점에 말 한마디 사과로 넘겼고, 고 한성옥 모자 사망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추모의 뜻도 밝히지 않았다. 오직 권력을 등에 업고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문득 작고하신 고 이봉조 통일부 차관이 아련히 떠오른다. 필자가 고인과 함께 금강산에 갔을 때 그는 “우리 통일부 요원들이 이 길을 뚫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수고가 있었는지 아느냐”며 몰래 눈시울을 붉히셨다. 자신의 공적을 뒤로하고 묵묵히 오직 통일의 한길만을 그렇게 걸으시며 큰 여운을 남기셨다. 최소한 국가를 위해 일하며 몸 바치는 공무원이라면 그것도 통일부의 수장이라면 최소한 철학과 가치 그리고 신념에 따라 일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남북한 주민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닐까?

그가 한 일이, 아니 앞으로 할 일이 그저 축사나 읊으며 행사장을 돌아다니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는지 개탄스럽다. 정의(Justice)를 부처명으로 쓰는 법무부에 정작 정의가 없고, 통일(Unification)을 부처명으로 쓰는 통일부에 정작 통일은 없다. 모두들 아니라고 하는데 자신들의 행위는 오직 무엇을 해도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적폐로만 간주하는 그들에게 조국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가? 왜 이리도 슬프고 아픈 조국의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는 걸까? 박수칠 때 과감히 떠날 용기는 없는 것인지…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