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도큐먼트] ‘참혹한 인권유린’ 경악과 분노 후에 필요한 것들

[김정은 정권 10년⑧] 고문·처형 등 北인권 침해 여전하지만 미약한 개선도 주목할 때

/그래픽=데일리NK

혹자는 20세기를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났던 시대라고 평한다. 수천만 명의 사상자를 낸 1·2차 세계대전과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자행된 국가 폭력을 떠올려보면 일견 타당한 말처럼 들린다. 21세기에 들어서고도 종교와 민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극단주의 테러리즘, 끝없는 대량살상무기 개발, 내전으로 인한 난민 행렬을 보고 있자면 끝내 비관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이른다. 과연 인류는 평화로 나아가고 있는가?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라면 아마도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그가 2011년 펴낸 역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전하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핑커 교수는 각종 데이터를 장장 1,400여 쪽에 걸쳐 제시하면서 문명의 형성과 규범의 확산, 권리혁명 등 기나긴 인류사를 지나는 동안 폭력이 꾸준히 감소해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쉽게 비관주의에 빠지는 건 세상의 나쁜 소식을 적나라하고 발 빠르게 전하는 미디어 때문이란 지적과 함께 말이다.

인류의 도덕적 진보를 확신하는 이 책을 덮으며 북한을 생각해본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현대사회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인권 침해가 70여 년에 걸쳐 북한에서 자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후 7년이 흘렀지만 북한인권 상황이 진일보했다는 평가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 당국에게 인권 침해의 책임을 묻는 유엔 총회 북한인권결의안이 매년 통과되고, 각종 대북 인권 제재가 시행되면서 덩달아 북한인권의 참상이 더욱 공론화되는 모습이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확인된 직후만 하더라도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젊은 지도자가 선대와는 다른 길을 갈 것이라는 낙관론이 작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 초기부터 고모부 장성택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주민들에 대한 통제 고삐를 당기면서 김정은은 일찍이 국제사회로부터 ‘인권 가해자’로 지목돼 왔다. 집권 10년 만에 수령의 반열에 오른 김정은을 두고 정치, 경제, 군사, 외교적으로 꽤나 후한 평가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인권에 있어서는 여전히 낙제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실제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데이터베이스에는 김정은 집권기인 2012년부터 2021년 12월 현재까지 발생한 북한인권 침해 사건이 4,874건 등록돼 있다. 정확한 연도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김정은 집권 이후 발생한 것으로 확인된 사건들까지 포함하면 약 5,000여 건에 달한다. 여기에는 자의적인 불법구금 1,735건, 강제북송 504건, 고문 687건, 구금시설에서의 고문 및 강제노동, 영양실조 등에 의한 사망 207건, 공개처형 179건, 비공개처형 81건이 포함돼 있다.

김정은 정권하에서 발생한 이 5,000여 건의 인권 침해 사건은 NKDB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전체 북한인권 침해 사건 8만여 건 중 6%를 조금 웃도는 규모다. 그러나 이는 불과 10년 사이에, 그것도 사선(死線)을 넘어 한국에 무사히 정착한 탈북민이 북한에서 경험했거나 보고 들었다고 증언한 사례들만 추려낸 것이다. 코로나19를 명분으로 빗장을 아예 걸어 잠근 북한 안에서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렇다 보니 북한인권에 대한 기대는 예나 지금이나 비관적이다. 지난 11월 NKDB가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북한인권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1.4%는 북한인권 상황이 “심각하다”고 했고 그 중 63.8%는 북한인권이 더 개선될 가능성도 없다고 내다봤다. 북한인권의 심각성을 폭로하는 보도와 연구결과는 연일 쏟아지는데, 정작 20여 년간 계속된 북한인권운동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뚜렷한 데이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듯 NKDB는 최근 탈북민들의 증언 속에서 과거보다 북한에서의 인권 상황이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법 기관이나 구금시설 근무자들에게 수감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김정은 명의의 방침이 떨어진다거나, 수감자를 폭행한 계호원이 인권 유린 혐의로 강등 처벌을 받는다거나, 예심 과정에서 당연시되던 고문과 폭행이 줄어들었다는 등의 소식들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탈북민들은 결국 북한 당국도 국제사회의 인권 개선 압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입을 모은다.

이제 북한에도 인권이라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유엔 마당까지 가서 증언하는 것도 다 노동신문에 나온단 말입니다. 노동신문은 한 줌도 안 되는 민족반역자들이 우리 공화국을 헐뜯는다고 했지만, 그 후로부터 인권이라는 소리가 북한에 어설프게나마 나돌고 법에도 인권을 지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지몽매할 때는 계호들이 막 때리고 그랬지만, 이제는 우리를 때려서 이득 볼 게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인류가 오랜 세월 숱한 혁명과 투쟁, 저항을 거쳐 천부적인 권리를 얻게 됐듯 어쩌면 북한인권운동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터널 속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고단하고 외로운 길이었지만, 북한인권 피해자들의 호소에 함께 울고 분노했던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미약하게나마 북한 땅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앞으로 남은 일은 북한에서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일이 아무런 제재 없이 당연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구조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리라.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들이 인류를 대상으로 자행될 수 있었는가라는 위선적인 질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의 권리와 특권들을 완벽하게 박탈하도록 한 법적 절차와 권력 장치들을 탐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북한인권운동도 경악과 분노 이후의 길을 만들어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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